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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훈의 유럽인문여행!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⑯ 엘 그레코의 예술적 영혼이 깃든 중세의 도시, 스페인 톨레도
기사입력 2020.05.07 10:4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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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도시, 톨레도는 1597년 화가 엘 그레코가 그린 ‘톨레도의 풍경’처럼 시공간을 초월해 21세기에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슬람과 유럽의 건축 양식이 혼재된 톨레도의 모습은, 엘 그레코가 살았던 시대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다만 엘 그레코는 ‘톨레도의 풍경’에서 하늘을 검은 회색으로 표현했지만 500년이 지난 오늘날 하늘빛은 그의 명성만큼이나 눈부시게 푸르다.

톨레도가 스페인의 수도였던 적은 두 번이다. 로마제국이 위태로울 때 게르만 계통의 서고트족이 지배했을 때와 1492년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이사벨 여왕이 통일된 수도로 톨레도를 선택했을 때이다. 또한 톨레도는 이슬람교도, 그리스도교도, 유대교도 등이 번갈아 지배했던 곳이라 여느 도시와는 다른 종교적인 분위기가 가득하다. 특히 이슬람교도들이 지배하던 시대에 발달한 무데하르 양식은 톨레도를 독특한 도시로 만들었다. 800여 년 가까이 스페인을 지배한 이슬람 문화는 15세기 들어 국토회복운동에 의해 점차 쇠퇴하고, 그 자리를 다시 그리스도교 문화에 넘겨주었다. 이때 로마네스크 건축물이나 고딕 건축물들은 이슬람풍의 화려한 아라베스크 무늬와 말굽 모양 아치, 평면에 붙이는 타일 장식 등 특이한 공간 구조를 연출해 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스페인 고유의 무데하르 양식을 만들어냈다. 훗날 이 양식은 스페인 최고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수천 년 동안 변함없이 흐르는 타호강을 품고 언덕을 따라 형성된 톨레도. 구시가지 중심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골목길은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높고, 비좁다. 모든 건물이 색채와 모습이 비슷해 이정표를 보지 않고서는 쉽게 분간하기 어려운 곳이 바로 톨레도의 건축물이다.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깊숙이 다가설수록 화려함과 웅장함 그리고 위풍당당한 모습이 눈앞에 계속해서 펼쳐진다.

사실 톨레도를 찾는 대부분의 여행자는 1492년 통일된 스페인의 옛 수도이자 고색창연한 도시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16세기 톨레도에서 이방인으로서 평생을 그림을 그리다가 죽은 엘 그레코의 흔적을 좇기 위해서이다.

20세기 표현주의 화가로 재평가되기 이전에 서양미술사에 그리 알려지지 않았던 엘 그레코. 그는 그리스 크레타섬에서 1541년에 태어나 22세 때부터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로마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다. 그는 죽는 날까지 자신의 작품에 그리스 글자로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라는 본명으로 서명했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를 ‘그리스 출신’이라는 뜻의 ‘그레코’로 불렀다. 그의 이력 중에서 특이한 점은 29세 때 로마에서 후원자 클로비오의 도움을 받아 추기경과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미켈란젤로가 그린 불후의 명작, ‘최후의 심판’보다 그 자리에 더 좋은 그림을 그리겠다고 교황에게 제안했다가 로마 화가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엘 그레코는, 더는 로마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통일된 스페인을 이끌던 펠리페 2세 국왕은 톨레도에서 마드리드로 수도를 옮기면서 수도원과 성당 그리고 묘지 등이 있는 거대한 에스코리알 궁전을 짓고 있었다. 복합건물인 에스코리알 궁전 내부에는 40여 개의 제단화가 설치될 예정이었기에 수많은 화가가 필요했다. 엘 그레코도 자연스럽게 이탈리아 화가들과 함께 마드리드로 왔고, 펠리페 2세를 위해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왕의 취향과 맞지 않아 에스코리알 궁전 벽화 작업에 참여하지는 못하였다.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갈 수 없었던 엘 그레코는 1576년 스페인의 옛 수도인 톨레도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오히려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었을까? 엘 그레코는 죽기 전까지 40여 년 동안 톨레도에서 머물며 주옥 같은 그림을 그렸다.

현재 톨레도에는 그의 작품이 모여 있는 엘 그레코 하우스, ‘성의의 박탈(1577~1579년)’과 ‘베드로의 눈물(1580년)’이 있는 톨레도 대성당,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1588년)’ 벽화가 있는 산토 토메로 교회, 마지막으로 ‘삼위일체(1577~1579년)’와 ‘성모승천(1577~1579년)’ 제단화와 그의 무덤이 있는 산토 도밍고 엘 안티구오 성당 등에서 엘 그레코의 예술적 영혼과 만날 수 있다.

우선 엘 그레코 하우스는 실제로 그가 거처하던 집은 아니며, 1906년 스페인 국립 관광국장이던 베가일클란 후작이 엘 그레코가 살던 옛집 인근의 폐가를 사들여 1911년 미술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내부는 미술관과 살림집 각각 두 개의 건물로 구성돼 있고, 미술관에는 엘 그레코가 그린 12 사도의 초상화를 비롯해 1610년대에 그린 ‘톨레도의 전경과 그림’이라는 진품 등이 전시돼 있다. 다음은 톨레도에서 가장 오래되고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대성당에서 ‘성의의 박탈’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사제가 미사를 할 때 옷을 갈아입는 방에 걸릴 예정으로 그린 것이다. 하지만 예수 뒤로 군중의 머리들이 더 높게 그려졌고, 왼쪽 밑에는 성서에도 없는 3명의 마리아가 등장하고, 로마 군사는 예수 시대가 아닌 중세 시대의 갑옷을 입었다. 이런 이유로 성당에서는 그림값을 원래의 4분의 1만 지급해 엘 그레코는 성당과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성의의 박탈’ 옆에는 2개의 열쇠를 들고 참회하는 모습의 ‘베드로의 눈물’이라는 작품이 걸려있다. 재미있는 것은 엘 그레코가 자신의 공방을 운영하기 위해 대중성 있는 그림들은 복제하여 판매했는데, 그 중에 ‘성의의 박탈’은 16점을, ‘베드로의 눈물’은 20여 점 이상 다양하게 그렸다고 한다.

세 번째로 엘 그레코의 예술적 영혼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라는 벽화가 그려진 산토 토메로 교회이다. 이 그림은 1312년 오르가스 백작이 죽은 후 그의 선행을 추모하기 위해 성 스테파노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천상에서 내려와 직접 그의 관을 매장했다는 전설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살아서 교회와 사람들에게 많이 베풀고 봉사하면 하늘에 자리가 보장된다는 교훈적인 의미를 담고 있고, 그림 안에는 엘 그레코의 모습과 그의 아들인 호르헤 마누엘도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1614년 4월 7일 73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엘 그레코의 무덤과 ‘삼위일체’ ‘성모승천’ ‘세례자 성 요한’ ‘복음사가 성 요한’ ‘성 베로니카의 손수건’ 등의 제단화가 그려진 산토 도밍고 엘 안티구오 성당이다. 현재 이곳의 제단화들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무덤은 성당 내부 지하에 있는데, 바닥 유리를 통해 몇 평 안 되는 작고 초라한 곳에서 수백 년 동안 잠들어 있는 그의 영혼을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다.

톨레도에서 만난 엘 그레코의 작품들에서는 그가 그린 사람들의 표정이 아주 인상적이다. 색채가 그리 화려하지 않고 회색을 많이 사용해 다소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지만, 사람들의 독특한 표정과 눈빛에는 분명 엘 그레코만의 열정이 숨어 있는 듯하다.

[이태훈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6호 (2020년 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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