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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영의 영화로 보는 유럽사] 로마제국 시대 | 영화 과 ‘밧세바 신드롬’
기사입력 2020.02.05 15:43:33 | 최종수정 2020.02.07 15: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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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북아프리카를 지배했던 고대 최대의 로마제국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은 영화는 많다. 로마와 카르타고 간의 포에니 전쟁 기간을 다룬 <한니발>, 로마 삼두정치 시대의 권력투쟁과 제국으로의 이행을 담은 <클레오파트라>, 로마제국의 식민통치를 받은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유대인의 시련과 극복, 예수의 모습을 담은 <벤허>, 독단적인 정치를 강행해 근위대 장교에게 암살당한 폭군 칼리굴라 황제의 모습을 다룬 <칼리굴라>, 폭군 네로황제 시대의 기독교 탄압을 보여준 <쿼바디스>, 베수비오 화산 폭발을 극화한 <폼페이 최후의 날>,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그의 아들 폭군 코모두스 황제의 시대를 담은 <로마제국의 멸망>과 <글래디에이터> 등 테마도 다양하다.

로마제국의 멸망 (1964)



▶내분에 의해 붕괴된 로마제국

이 가운데 영화 <로마제국의 멸망(1964)>은 로마의 최고 부흥기인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시작으로 그의 아들 코모두스 황제를 거치면서 로마가 어떻게 멸망해 가는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로마 발흥에서 멸망까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발흥과 마찬가지로 멸망의 원인도 다양하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일시적 사건이 아닌 300년 동안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배경은 서기 180년 황제 아우렐리우스가 군대를 이끌고 북방 변경에서 게르만족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영화는 로마와 게르만족 간의 전쟁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기보다는 로마의 계승권 문제와 내부 분열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유능한 장군 리비우스의 활약상이 그려지고, 황제를 향한 수많은 속국과 총독의 충성 행렬이 이어진다. 또한 황제의 연설을 통해 당시 로마가 얼마나 많은 영토를 거느리고 얼마나 위상이 높았는지를 보여준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노쇠한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후계자로 그의 아들 코모두스가 아닌 양아들 리비우스 장군을 지목한다. 무능한 코모두스는 허탈해하며 운명에 맡기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코모두스의 측근에 의해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암살당하고 만다. 이로써 코모두스 황제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로마제국 시대를 보여주는 주요 장면들

영화 <로마제국의 멸망>은 고증의 사실여부를 넘어 코모두스 황제의 전횡을 견제하는 리비우스 장군의 모습을 중심으로 당대 로마의 사회상과 정치구조, 국제 관계 등 다양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가령 코모두스가 황제에 오르고 나서 로마를 활기차고 즐거운 도시로 바꾸겠다며 아사 직전에 있는 동방의 속국에 두 배의 세금과 공물을 바치라고 명령하는 것을 비롯해 반란이 일어난 도시를 대상으로 수천 명의 화형과 십자형을 주문하는 장면은 로마가 어떻게 망가져 가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황제가 시민들에게 유흥거리를 제공해서 인기를 얻거나 군인에게 금을 주면서 매수하는 모습에서는 당시 로마의 부패상을 엿볼 수 있고, 주변국과의 동맹을 위해 딸 루시아를 정략 결혼시키는 장면, 검투 장면, 원로원에서 논쟁을 벌이는 장면을 통해서는 로마의 풍속과 문화를 볼 수 있다. 이외에도 게르만족이 로마에 침략한 뒤 이주해 정착하는 내용을 통해 수많은 이민족으로 구성된 당대 로마의 복잡한 현실을 실감할 수 있다.

글래디에이터(2000)



▶영화 속 역사 vs 실제 역사

영화 <로마제국의 멸망(1964)>은 안소니 만 감독의 작품으로 리들리 스콧의 영화 <글래디에이터(2000)>와 비교하며 감상한다면 흥미를 더할 수 있다. 두 작품은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아우렐리우스, 코모두스, 루시아 등 동일한 실존 인물을 다루는 반면, 주인공인 리비우스(로마제국의 멸망)와 막시무스(글래디에이터)와 같은 허구의 인물을 상이한 캐릭터의 영웅으로 그려 서로 다른 느낌을 준다.

이처럼 영화는 그 특성상 감독의 상상과 의도에 의해 각색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 두 편의 영화 모두 의도적으로 각색된 역사적 사실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 영화 속에서는 공통적으로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친아들 코모두스가 아닌 양아들 리비우스(혹은 막시무스)에게 제위를 물려주려다가 암살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실제 세계에서는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친아들 코모두스에게 왕위를 물려줄 준비를 하고 군사 원정 중에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아들 코모두스를 후계자로 선택했다는 사실이 왜 문제가 되며, 이를 각색해 영화적 소재로까지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잠시 로마사를 언급해야 할 것 같다.

폼페이: 최후의 날(2014)



▶유능한 인물을 황제로 지명한 5현제 시대

공화정이었던 로마는 옥타비아누스를 시작으로 로마제국 시대에 접어들지만, 그의 사후 칼리굴라, 네로와 같은 폭군이 등장하여 내전에 휩싸이게 된다. 하지만 유능한 황제들의 출현으로 다시 융성한 시기를 맞게 되는데 이 시기가 바로 ‘5현제(五賢帝) 시대’이다. 영화가 시작되는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기는 5인의 명군(名君) 중 마지막 황제 때이다.

여기서 5현제 시대의 중요한 전통을 하나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이 시대에는 제위가 세습이 아니라 양아들 방식으로 원로원 의원에서 가장 유능한 인물을 황제로 지명했다는 것이다. 5현제의 첫 번째 황제인 법률가 출신 네르바 황제는 유능한 인물을 양자로 입양하여 제위를 잇게 함으로써 세습에 따른 한계를 해결하였다. 이후 양아들의 형태로 제위가 계승됨으로써 로마제국은 번영을 구가한다.

그러나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기에 자신의 아들 코모두스를 후계자로 지목함으로써 세습제가 부활된다. 코모두스는 역대 최악의 무능한 황제로 로마제국의 몰락을 이끈 황제였고 이후 제국 각지는 군대가 멋대로 황제를 폐립하는 군인황제 시대가 된다. 영화의 각색은 <명상록>을 남긴 유능한 황제 아우렐리우스가 도대체 암살을 당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무능하기 짝이 없는 코모두스에게 왕위를 계승했을까라는 영화적 상상에서 비롯된 듯하다.

▶밧세바 신드롬에 걸린 아우렐리우스?

이 영화는 흥미롭게도 오늘날 지도층의 윤리적 타락을 일컫는 밧세바 신드롬을 연상시킨다. ‘밧세바 신드롬’은 딘 러드윅, 클린턴 롱거네커 교수가 ‘성공했다고 생각되는 리더들에게 왜 자주 윤리적 문제들이 발생하는가’의 문제를 연구하면서 나온 용어이다. 밧세바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로 다윗이 범한 여인이다.

고대 이스라엘 2대 왕인 다윗은 블레셋 군대와 싸워 골리앗을 죽게 만든 민족의 영웅이지만, 휘하 장수의 아내인 밧세바에게 욕정을 품어 죄를 짓고 치명적 오점을 남기게 된다. 이 이야기에 빗대어 밧세바 신드롬은 성공의 정점에 다다랐을 때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과도한 자신감에 도취되어 윤리적 실패를 하는 것을 말한다. 로마는 5현제 시대에 최고의 번영을 누리지만, 농민층의 몰락, 속국의 반란, 노예제 문제 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점점 전제군주화된다. 영화에서 보여주듯이 속국에 대한 착취와 수탈에 근거해 로마시민과 군인에게 금권정치가 실시되고 포퓰리즘이 성행하며 도시의 자율성이 사라진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코모두스 황제가 죽은 후 고위층들이 그 자리를 돈으로 서로 사려는 장면은 탄식을 자아내게 한다. 로마의 번영을 구가한 명군 아우렐리우스가 자신의 아들까지 명군이 될 것이라는 과도한 착각이 없었더라면, 더 나아가 로마의 전성기 5현제 시대에 ‘성공 안에 실패의 요인이 담겨있다’는 밧세바 신드롬을 인식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영화 마지막에 나온 내레이션인 “이것이 로마 제국 멸망의 시작이었다. 위대한 문명은 외부의 침략에서가 아니라, 내분에 의해 붕괴된 것이다”라는 문구가 ‘잘 나갈 때 더욱 자신을 다스릴 필요가 있다’는 밧세바 신드롬이 주는 의미와 연결되는 것은 필자만의 느낌일까?

[이미영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3호 (2020년 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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