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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마음산책] 예순을 넘긴 형제들의 대화
기사입력 2018.08.28 14:4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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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마음이라는 건 내가 간장게장을 잘 먹으면 남들도 잘 먹는 줄 알고, 내가 순댓국을 부담스러워하면 남들도 그다지 즐겨하지 않는 줄 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하는 모든 공산품의 규격이 KS(한국공업구격 Korean Standard)에 맞춰져 있듯 식성도 생활방식도 무엇에 대한 호오의 감정과 추억의 기억까지 모두 자신에게 맞춰져 있다.

나는 60이 넘은 형제들과 자주 문자를 주고받는다. 안부 문자만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재미와 이야깃거리를 친구들과도 이야기하지만 형제들과 이야기할 때도 많다.

얼마 전 친구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는 중에 서해로 낚시를 떠난 중형(仲兄·둘째형)께서 핸드폰 문자로 ‘썰물 때 갯벌 안으로 3㎞ 들어가서 낙지, 농어, 숭어, 복어, 전어, 아귀, 새우 등 많이 잡았다’며 사진을 보내주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해 몇 마디 더 문자를 주고받느라 친구와의 대화가 잠시 끊어졌다. 친구가 누구와 그렇게 즐겁게 문자를 주고받느냐고 물어 예순일곱 되신 중형이라고 대답하자 친구가 예순 넘은 형제들도 이렇게 젊은 친구들처럼 재미나게 대화를 하냐고 오히려 놀란 얼굴을 했다.

그래서 이건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라며 형님이 ‘이청준의 작품 가운데 다방 레지 이야기가 삽화로 나오는 소설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떤 작품인지 사오십 년 전의 기억이라 가물가물하다. 무슨 작품인지’ 하고 문자를 보내와 ‘아, 그게 <조율사>라는 작품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기적이라는 다방에 여러 작가가 모여 이야기하는 부분의 얘기 같은데요’ 하고 보낸 문자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친구가 무슨 60 넘은 형제들이 그냥 안부 문자도 아니고 이런 문자를 주고받느냐고 그야말로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친구뿐이 아니다. 추석이나 설날에 형제들이 모였을 때에도 동서양의 고전 이야기를 한두 시간 이상 주고받을 때도 있어 이따금 아내로부터 명절에는 좀 명절 분위기 나는 대화를 하라는 잔소리를 들을 때도 있다. 그런 어려운 대화만 주고받는 건 아니다. 월드컵 기간 동안 우리나라가 독일을 이겼을 때 ‘어디에서 본 건데, 맥주의 나라 독일의 골대는 Beer 있었다’고 하는 젊은이들 사이에 오가는 재치 있는 말을 보내오기도 했다. 아무튼 친구는 60 넘은 형제들이 그런 문자를 주고받는 게 신기하다고 했다. 우리는 늘 그렇게 해 와서 그게 자연스럽다. 중형하고만 그런 게 아니다. 5남매가 같이 자랐는데, 제일 막내 말고는 4남매의 나이가 60이 넘었다.

며칠 전에는 내가 사는 공동주택단지 정원에 나리꽃이 군락을 이루듯 많이 피어서 그걸 형제 모두에게 단체로 보내며 이렇게 문자를 달았다. ‘이렇게 흐드러진 나리꽃을 보면 어릴 때 산에 소 먹이러 다니던 때가 생각이 나요. 여우밭 가에 나리꽃이 참 많이 피었는데’ 그러자 미처 문자를 보지 못한 백형(伯兄·맏형) 말고는 중형과 동생들의 문자가 차례로 왔다.

‘나리꽃은 골안 할아버지 산소 가에서 여찬 댁 산 쪽으로 많이 피었고, 우리 집 뒷산 너머 옻나무 골에도 많이 피었다. 특히나 꽃이 큰 나리꽃은 곶집(상여막) 옆 냇가를 따라서도 많이 피었어.’(중형이 보낸 문자).

‘이건 잎과 줄기 사이에 까만 구슬 같은 게 달려 있는 참나리 꽃이네요. 여우밭 가에는 하늘말나리가 많이 폈어요. 산에 나무들 사이에 피는 꽃이라 사진 속의 꽃처럼 크지 않고 조금 작게요.’(60 넘은 여동생이 보낸 문자)

‘여기는 정원이라 햇볕도 잘 받고 거름도 많이 해서 산에 피는 꽃들보다 크지.’(내가 보낸 문자)

‘그래요. 이맘때 산에 소 먹이러 가면 나리꽃과 도라지꽃을 가끔 만났지요. 어릴 적 우리 집 암소가 생각나네요. 점잖은 눈망울에 곧은 뿔, 약간 검은 색이 도는 털빛. 망월리와 앞골에 논 갈러 갔다가도 집에 올 때 사람보다 앞세우면 길 가르쳐 주지 않아도 혼자 집까지 찾아왔지요. 작은댁 소는 눈이 부리부리하고 뿔이 약간 안으로 휘었는데 그래서 좀 사납기도 했고요. 나리꽃은 작은댁 사랑 바깥에도 키다리꽃(우리 형제들이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겹삼입국화)과 같이 피었어요. 지금쯤 우리 집 배롱나무도 꽃이 한창일 텐데.’(아직 60이 안 된 막냇동생이 보낸 문자)

‘그래. 그 소 이름이 검은눈이였어. 전에 아버지 살아계실 때 여쭈니 아버지 어머니도 그 소 얼굴을 기억한다고 하셨어. 일을 잘해 마지막 팔려갈 때 팔려가지 않고 옥궐댁 소와 목숨을 바꾼 소인데. 내 소설 <워낭>의 주인공이기도 하고.’(내가 보낸 문자)

‘맞아요. 참 순하고 점잖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소였어요. 말을 참 잘 듣고요. 작은댁 소처럼 행패를 부리지 않았지요.’(막냇동생이 보낸 문자)

이렇게 60이 훨씬 넘었거나, 60이 되었거나, 곧 60이 될 형제들의 대화로 50년쯤 전 집에서 식구처럼 기르던 ‘검은눈이’라는 암소에 대한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마 그 소는 아버지, 어머니뿐 아니라 살아 계시다면 120살이 되시는 할아버지께서도 얼굴을 기억하는 소일 것이다. 신학문을 한 아버지도 농촌에서 태어나 논밭에서 소를 부리는 쟁기질을 할 줄 알았지만, 어린 우리 기억으로 그 소는 할아버지와 함께 논밭에서 더 많은 일을 했다. 소로 농사일을 하던 시절이라 어느 집도 소가 한번 집에 들어오면 10년 이상, 더 길게는 20년 가까이 그 집 외양간을 지키며 사람과 똑같이 논밭의 일을 했다. 그날 우리 형제들의 대화는 나리꽃과 배롱나무꽃과 우리 집에서 키우던 검은눈이 소 이야기에서 멈췄지만, 어릴 때 우리의 기억으로 그 소는 잠을 자는 곳이 외양간이어서 그런 거지 거의 식구와 똑같은 느낌 속에 자랐다.
할아버지는 매년 새해 첫 축일(丑日, 소의 날)이면 그날이 소의 생일날이라고 해서 다른 때보다 쇠죽가마에 더 많은 콩과 옥수수 알곡을 넣어 쇠죽을 끓였다.

이런 옛 추억을 함께 주고받을 수 있는 형제들이 건강하게 내 옆에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내 인생의 큰 축복이다.

[소설가 이순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95호 (2018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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