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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우의 보르도 와인 이야기] 한때 위기 프랑스 와인산업, 구세주는 한국인
기사입력 2018.06.15 11: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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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보르도에서 생산되는 와인 4병 중 한 병은 중국 사람이 소비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작년에 판매된 보르도 와인 4병 중 한 병 이상이 중국과 홍콩으로 수출되었다. 지금은 중국이 프랑스 와인의 가장 큰 시장이지만, 중국 사람들이 프랑스 와인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2005년 아직 중국 사람들이 프랑스산 와인의 맛을 모르던 시절, 기술의 발전으로 와인 생산량은 계속 늘어나는 데 비해 수요는 그만큼 따라가지 못한 프랑스의 와인 산업은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수요가 늘기는커녕 오히려 프랑스의 젊은 사람들의 와인 소비는 눈에 띄게 줄고 있었다. 프랑스 정부와 유럽 연합은 와인이 과잉 생산되고 있다고 진단하고, 그 생산량을 줄이기 위한 여러 정책을 내놓았다. 하나의 예로 와인 농부가 포도밭의 포도를 뽑고 그 자리에 다른 농사를 지으면 보조금을 지급했는데, 지방 정부와 유럽연합 그리고 중앙정부 예산을 합치면 헥타르당 최대 3만유로, 평당 1만원 정도의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공격적인 정책이었다.

나는 당시 보르도 동쪽에 위치한 리부른(Libourne)이라는 작은 도시에 살며 지역의 와인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리부른은 고급 와인으로 유명한 인근의 포므롤(Pomerol)과 생테밀리옹(St Emilion)의 와인들이 집산되고 다시 팔려 나가는 보르도 동부 와인의 중심 도시다. 프랑스 보르도 지역은 크게 두 지역으로 나뉘는데, 보르도를 관통하는 지롱드 강의 왼쪽(서쪽)과 오른쪽(동쪽)으로 구분한다. 강의 왼편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메독(Medoc) 지역과 그라브(Grave) 지역이 있고 지롱드 강의 오른쪽 즉 동편에는 생테밀리옹과 포므롤 지역이 가장 유명하다. 지롱드 강은 폭이 넓고 물살이 세서 다리가 놓여 있지 않던 옛날에는 왕래하기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가까이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종교적, 문화적 배경을 가지게 되었고, 두 지역 주민들 사이의 경쟁의식도 생기게 되었다. 큰 와인 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보르도 동쪽과 서쪽의 포도원 주인들은 가장 좋은 날짜에 가장 좋은 장소에서 연회를 주최하기 위해 서로 신경전을 펼친다.

보르도 서쪽, 대표적으로 메독 지역의 포도밭을 일군 사람들은 대부분 무역으로 돈을 번 대부호들이나 귀족들이었다. 그리고 이곳의 와인들은 가까이 위치한 대서양을 통해 주로 잉글랜드로 수출되었다. 메독 지역의 포도원들은 마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목화농장과 같이 대규모로 경작되며, 큰 저택이나 프랑스어로 ‘샤토’(Chateau)라고 불리는 성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샤토에선 전 세계의 고객들 혹은 지역의 유력 인사들을 초대한 사교적인 연회가 자주 열리며, 잘 차려 입은 귀족들이 참여하는 파리의 연회에 그 화려함이 뒤지지 않는다. 이곳의 대표적인 포도원으로는 ‘5대 샤토’라 불리는 샤토 라피트 로칠드, 샤토 마고, 샤토 라투르, 샤토 오브리옹 그리고 샤토 무통 로칠드가 있다. 이 포도원들의 주인들은 은행가, 명품재벌, 유럽 왕족 출신들이며 100년 이상 계속 적자를 보아도 충분히 견뎌낼 수 있을 정도의 튼튼한 배경을 가진 가문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에서 인기 있는 샤토 탈보 포도원도 이 지역에 위치해 있다. 반면 지롱드강 동쪽의 포도원들은 규모가 작고 포도밭을 일구는 사람들도 좀 더 평범한 시골 농부들에 가깝다. 전통적으로 북유럽으로 와인을 수출해 왔고 이곳 포도밭의 주인들은 대대로 땅을 일군 농부이거나 석공, 전직 나이트클럽 DJ, 식당 주인, 약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서쪽 동네 사람들에 비해서는 다소 소박한 편이다. 물론 이곳에서 생산되는 페트뤼스, 샤토 슈발 블랑, 샤토 오존, 샤토 르팽 등은 서쪽에서 생산되는 5대 샤토 와인보다도 오히려 비싸게 팔리지만, 그 생산량은 매우 작다. 가령 샤토 라피트 로칠드가 연간 40만 병의 와인을 생산하는 데에 비해 샤토 오존은 겨우 2만~3만 병에 불과하다.



▶포도원을 살린 한국 신사의 선견지명

프랑스 와인 산업이 몹시 어려웠던 2000년대 초, 보르도 동쪽의 포도원들의 상황은 서쪽의 포도원보다 훨씬 심각했다. 메독 지역의 포도원들은 일찌감치 자녀들을 아시아를 포함한 세계 곳곳으로 보내 세상의 변화를 배우게 하였고, 덕분에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며 판매처를 다변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산과 일손이 부족해 자녀들을 지역에 가둘 수밖에 없었던 동쪽의 포도원들은 아무래도 시장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없었다. 기존의 고객들이 구매를 줄이면 고스란히 수입에 타격을 받았다.

2005년 어느 날 학교 선생님께서 심각한 표정으로 수업을 시작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2004년 포므롤의 포도원 중에서 흑자를 기록한 곳은 두 곳에 불과했으며, 이대로 가다가는 지역 농부들의 자식들이던 내 학교 동료들이 가업을 잇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생테밀리옹과 함께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포므롤 지역이 이럴 정도였다.

그해 말,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프랑스를 방문 했을 때 보르도 지역신문에는 술 좋아하는 한국 사람에게 보르도 와인을 많이 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기사가 날 정도로 절박했다.

그 기대가 현실이 되었을까. 이듬해인 2006년 봄, 정례적인 보르도 와인 시음 행사가 열렸을 때 우리 동네에 어느 한국 신사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와인의 품질은 좋았지만 재정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던 포므롤의 한 포도원에 대한민국의 한 신사가 와서 와인을 시음한 후 남은 재고를 모두 사갔고 덕분에 그 주인이 부도의 위기를 모면했다는 소문이었다. 아시아 국가에서 온 바이어가 보기 드문 시절이라 어떤 포도원이었는지 몹시 궁금해 주변 친구들에게 수소문해 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소문이 사실인지 알아낼 수도 없었지만 와인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작은 시골 동네의 민심에는 큰 영향을 미쳤다.

일단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대한민국 출신의 학생인 내게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은 내게 “한국 사람들은 가치 있는 것을 제대로 아는 문화인”이라고 칭찬하거나 “프랑스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라며 괜히 아는 척을 했다. 당시 큰 와인회사에 하청형태로 포도원액을 공급하고 있는 부부가 찾아와 자기 이름으로 된 와인을 만들어서 한국 시장을 공략하고 싶다며 조언을 구했던 적도 있었는데, 비록 그들의 와인을 한국 시장에 소개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프랑스 와인 산업을 피부로 느끼고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로부터 거의 5년 후 우연한 기회에 당시 대한민국에서 온 젠틀맨이 한독와인의 김학균 대표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가 구사일생으로 살려낸 포도원이 샤토 벨 브리즈(Chateau Belle Brise)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김학균 대표에 따르면, 이 와인이 한국 시장에서 성공할 것 같아서 많은 양을 수입하였으나, 한동안 생각보다 잘 팔리지 가 않아서 본인도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이후 우리나라 최고 소믈리에 중 하나인 서희석 소믈리에에 의해 포시즌 호텔에 리스팅되었고, 마침 그의 고객들이 이 와인을 좋아해 샤토 벨 브리즈는 포시즌스 호텔을 대표하는 와인이 되었다. 오늘날 포므롤 와인은 최고급 보르도 와인을 상징하지만, 포므롤 와인이 이와 같은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불과 50여 년 전으로 샤토 벨 브리즈의 스토리처럼 극적인 데가 있다. 포므롤이란 이름은 사과를 의미하는 라틴어 포마(Poma)에서 나왔으며, 이 지역은 원래 과일과 곡식을 같이 재배하는 지역이었다. 와인의 품질도 인근의 생테밀리옹에 비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는데, 약 100년 전 기록에 의하면 지금은 보르도에서 가장 비싼 와인으로 꼽히는 페트뤼스도 당시에는 중간 정도의 품질을 지닌 와인으로 평가되었다. 1940년대에 포므롤 와인의 유통업자인 장 피에르 무엑스(Jean Pierre Moueix)가 페트뤼스의 경영에 참여하면서 페트뤼스뿐 아니라 지역 와인의 품질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지역의 와인을 전 세계에 수출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낸 장 피에르 무엑스는 고객들이 어떤 와인을 원하는지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새로운 스타일을 유행시킬 수 있는 유통망도 갖고 있었다. 당시 유행의 아이콘이었던 영국의 엘리자베스2세 여왕이 자신의 생일 와인으로 페트뤼스를 따는 행운도 물론 곁들여졌다. 평범한 포므롤 와인은 너무 무겁고, 최근 빈티지를 마시기에는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하지만 잘 만든 포므롤 와인들은 오랫동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중후함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신선함이 살아 있다는 장점이 있다. 대표적으로 페트뤼스를 꼽을 수 있으나 수백만원이나 하는 가격이 부담스럽다.
그보다 저렴한 와인 중에는 샤토 레벙질이나 샤토 라플뢰르(Ch Lafleur), 샤토 라 콩세이엉트(La Conseillante), 뷰샤토 세르탕(Vieux Chateau Certain), 샤토 가쟁(Ch Gazin) 등이 최고의 품질을 가진 포므롤 와인들이다. 하지만 애호가가 아닌 사람들이 즐기기에는 여전히 가격이 부담스럽다. 포므롤의 터줏대감인 JP 무엑스 사에서 만드는 장피에르무엑스 포므롤이나, 생산량이 적어서 아직은 공항면세점에서만 판매하는 블라종 레벙질(Blason l’Evangile)은 좋은 퀄리티의 포므롤 와인을 가장 저렴하게 마실 수 있는 옵션 중 하나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93호 (2018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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