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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비극적 사랑과 소설의 역사적 증언을 합한
기사입력 2018.03.16 09: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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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이 넘는 대작영화 <닥터 지바고>의 전체스토리는 기억 못 한다 해도, 애잔한 음악 ‘라라의 테마’를 배경으로 광활한 설원을 썰매를 타고 가로지르는 맑은 눈망울의 두 남녀는 아직도 수많은 영화 팬을 설레게 한다. 영화 <닥터 지바고>는 <콰이강의 다리>, <아라비아 로렌스> 등의 명작으로 아카데미상을 휩쓴 레이비드 린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1965년에 개봉한 영화로 제작 전부터 화제를 모으며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영화다. 허나 관심을 받던 이유가 감독의 유명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원작 소설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가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하는 엄청난 파장이 전 세계를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암흑의 시대를 살았던 작가의 의무이자 사명

러시아 근현대사는 얼룩진 피와 눈물 그 자체였다. 차르시대의 무자비한 착취, 분노와 원한이 점철되어 터진 연이은 혁명들, 두 번의 세계대전이 있었지만 그보다 더 처참했던 것은 동족에게 총을 겨누어야만 했던 내전이었다. 이를 온 몸으로 목격한 시인 파스테르나크는 시대의 아픔을 글로 기록하며 증언하기를 원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엘리트 예술교육을 받고 출세 가도를 달려 러시아 문단의 촉망받는 상징주의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1917년 10월 혁명으로 레닌이 러시아에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자 그의 신세는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1930년부터 러시아의 모든 예술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의거한 작품만 인정받았다. 아방가르드적인 시는 언제 반체제선동으로 검열되어 강제수용소에 보낼지 모르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창작 집필은 꿈도 못 꾸고 번역에 의존하며 근근이 연명하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조용히 소설을 시작한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자 속도에 박차를 가해 5부작 장편소설 <닥터 지바고>를 11년 만에 완결했다.

출판은 꿈도 못 꾸다가 스탈린의 뒤를 이은 후르시초프가 스탈린을 비판하며 탈스탈린 정책을 펴자 여기에 고무된 파스테르나크는 자신의 소설 <닥터 지바고>도 출판될 수 있다는 장밋빛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원고를 받은 모스크바의 출판사는 ‘조국의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중상모략했다’며 파스테르나크를 강력하게 비난하기에 이른다. 이에 낙담한 파스테르나크에게 이탈리아의 펠트로니 출판사가 은밀히 연락해 왔다. 당시 이탈리아공산당은 소련공산당에 가장 많은 해외당비를 납부하고 있었고 양국은 상당하게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세상 물정을 모르던 파스테르나크는 별다른 의심 없이 저작권을 이탈리아 출판사에 일임하며 이탈리아어로 우선 출판을 허락했다. 그러나 이내 영어 번역본도 거의 같은 시기에 출판되자 그의 <닥터 지바고>는 냉전주의 미소양국 논란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 아무리 노벨상이 세계최고의 권위와 영예를 가질지라도 그에게 노벨상은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격으로 자신과 주변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였다. 러시아 작가동맹에서 만장일치로 제명당하는 격렬한 비판 속에 그는 추방을 면하고자 기꺼이 노벨상을 버리고 조국을 택한다. 곤혹을 겪은 2년 후, 소설 속의 주인공 유리 지바고처럼 그도 시름시름 앓다가 지병인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아마도 화병이 아니었을까 싶다.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는

비극적 남녀의 파란만장한 운명적 사랑

파스테르나크가 사망하고 28년이 지나자 러시아에도 자유의 새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드디어 1988년 러시아인들은 소설 <닥터 지바고>를 러시아어로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이듬해에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노벨상을 대리 수상한다. 1964년에 제작된 영화 <닥터 지바고>는 당연히 러시아 배우들이 참여할 수 없었고, 러시아에서 찍을 수 없었다. 1990년대 우리나라에서 시판되었던 담배 이름으로도 알려진 지바고 역의 오마르 샤리프는 이집트 배우이고 라라 역의 줄리 크리스티는 영국 배우이다. 또한 영화 속 설원의 명장면은 스페인에서 인공눈을 뿌려 가며 조달해서 촬영했다. 제작은 이탈리아에서 맡았다. 제작자 폰티는 여주인공 라라 역에 자신의 부인인 소피아 로렌을 강력하게 추천했지만, 감독은 서른이 넘어 성숙한 이미지의 소피아 로렌은 초반에 등장하는 10대의 청초한 라라를 연기하기에는 부적합하다며 20대의 줄리 크리스티로 촬영을 강행했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대성공이었다. 만약 농염한 소피아 로렌이 여주인공 라라를 맡았다면 시대의 격랑 속에 운명적 사랑을 껴안는 비련의 라라보다는 억세고 거친 운명의 파도를 헤치는 강인한 라라로 부각되었을 것이다.



▶지바고(Zhivago)는 고대 그리스어로 삶(生)을 의미

사실 소설 <닥터 지바고>는 파스테르나크가 아니라 그의 연인이자 ‘라라’의 실제 모델이었던 교사 출신의 아마추어 시인 ‘올가 이빈스카야’가 대필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정도로 혹평과 극찬의 호평을 극단적으로 받았다. <닥터 지바고>는 근대 러시아 소설과는 전혀 다른 구조로, 마지막 5부는 지바고가 쓴 25편의 시만 등장한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겪으면서도 하나같이 내면적 변화와 성숙이 없고 등장한 첫 페이지 그대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시간이 변해도 사람은 변치 않는다. 그러다 보니 소설에는 인물 내면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 미흡할 수밖에 없다. 굴곡진 역사 속 방대한 스토리도 스크린에 담기 쉽지 않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의 변치 않는 내면을 표정과 대사로 표현하게 하는 것도 감독으로는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데이비드 린 감독은 지바고 역의 샤리프에게 연기하지 말고 무표정으로 있으라고 요구했다는 후문이다. 반면 뮤지컬에서 지바고는 노래넘버로 순간순간 변화하는 내면을 표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원작의 틀 안에서 보다 역동적이고 열정적으로 인물 정서를 표현한다.

소설에서 남녀 주인공은 우연히 5번을 만난다. 의도하지 않은 만남으로 그들은 서로를 처음 만나고 알아 가며 사랑에 빠지고 헤어지고 아파한다. 마지막 5번째 만남에서 지바고는 우연히 스친 라라의 뒷모습을 쫓아가다가 심장마비로 거리에서 죽는다. 소설에서는 우연이 너무 남발된다는 지적도 있지만 영화에서는 모든 것이 운명의 끈으로 실타래처럼 엮기고 엮였다는 작가적 세계관을 고스란히 반영했고, 뮤지컬에서는 이를 낭만이 가미된 공감각적 서사무대를 이용해 한층 업그레이드시켰다.

특히 6년 만에 다시 찾아온 2018 뮤지컬 <닥터 지바고>는 연출, 음악, 무대, 조명, 영상을 진일보시키며 관객들을 찾아온다. 특히 무대 3면을 둘러싼 LED면을 통해 러시아의 이국적 풍경을 파노라마로 구현한다.
장르 특성상 아무래도 뮤지컬은 감미로운 음악과 이룰 수 없는 운명적 사랑에 포커스를 맞출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를 도덕적 기준 혹은 신파극의 흥미나 오락으로 터부시하기보다는 원작이 지향하는 철학적 휴머니티의 심오한 서사를 중점으로 감상한다면 그 감동의 울림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참혹한 암흑의 러시아 근현대사를 격동적으로 지나온 1950년대의 작가가 2018년을 사는 우리에게 전하는 불멸의 가치가 주옥같은 선율과 함께 보일 것이다.

[황승경 국제오페라단장, 사진제공 오디컴퍼니]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90호 (2018년 0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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