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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우의 보르도 와인 이야기 |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만 알아도…
기사입력 2018.02.28 16: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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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5대 샤토 중 하나인, 샤토 라피트 로칠드의 양조 책임자 에릭 콜러(Eric Kohler)는 김치를 좋아한다. 에릭이 한국에 와본 것은 단 한 번뿐이고 아는 한국 사람이라고 해봐야 나를 포함해 다섯 사람을 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한국 음식을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김치는 잘 먹는다. 심지어 에릭은 현지에서도 100만원이 넘는 고급 와인과 김치를 같이 즐긴 적도 있다고 했다. 2000년대 중반, 김치가 보르도 와인 업계의 고민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중국시장이 지금처럼 성장하기 전에 프랑스 와인 업계 사람들은 한국시장이 프랑스 와인의 미래라고 생각했다. 프랑스 언론들은 심지어 프랑스 정론지인 르몽드(Le Monde)까지 나서 내수가 후퇴하기 시작한 프랑스의 전통 산업을 술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이 구해줄 것으로 보도했다. 그러자 프랑스 사람들은 한국 소비자들의 입맛을 공략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를 진행했는데, 그 일환으로 2007년 보르도 대학 양조학과에서는 한국 음식 특히 김치와 가장 잘 어울리는 보르도 와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한 세미나를 진행한 적도 있다.

사실 와인을 즐기는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와인 안주로 김치가 썩 좋지 않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세미나에 참석해서 김치를 처음 맛본 프랑스 와인 생산자들은 김치의 자극적인 맛에 적지 않게 당황했을 것이다. 어쨌든 세미나에 따르면, 김치에 가장 잘 어울리는 와인이 하나 있었다. 보르도 남쪽의 소테른 마을에서 생산하는 달콤한 와인 중 하나로, 당시만 해도 5대 샤토보다 더 비싸게 팔렸고, 현재 루이비통에서 소유하고 운영하는 ‘샤토 디켐(Chateau d’Yquem)’이 바로 그 와인이다. 샤토 디켐의 풍부하고 달콤한 맛이 김치의 매운 맛을 깨끗하게 해주고 심지어 입안에 좋은 여운마저 남겨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 한국의 와인 시장이 당시 프랑스 사람들의 바람만큼 커졌다면, 김치가 프랑스 부유층의 고급 디저트로 재탄생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와인 시장이 그렇게 성장하지는 못했다.

김치가 비록 와인과 잘 어울리지는 않지만 김치는 프랑스 와인과 가장 비슷한 음식이다. 발효 음식이라는 점 그리고 지역마다 특색이 있는 와인과 김치가 있다는 점도 같다. 심지어 우스갯소리로 붉은 김치(적포도주)와 백김치(백포도주)가 있는 것도 비슷하다. 팔도마다 다른 김치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 고유의 ‘젓갈’이라면, 프랑스 와인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바로 ‘포도품종’이다. 기후가 다르고 토양이 다른 각 지역에서는 그에 적합한 포도를 재배한다. 예를 들자면, 가장 우아한 포도라고 불리는 피노 누아(Pinot Noir)는 추운 지방에서 잘 자라서 북쪽의 샹파뉴(Champagne)나 내륙의 부르고뉴(Bour gogne) 지방에서 재배했을 때 가장 맛있는 와인을 만든다. 반대로 진하고 깊은 맛을 내는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과 메를로 (Merlot)라는 포도는 남쪽에 위치한 보르도의 따뜻한 기후에서 잘 자란다. 자연적인 이유 외에 역사적인 배경을 갖고 있는 포도도 있다. 프랑스 리옹 남쪽에 있는 론(Rhone) 계곡의 농부들은 시라(Syrah)라는 포도를 많이 재배하는데,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던 한 기사가 중동에서 가져와 심었다는 전설이 있다.

전 세계의 모든 와인은 이 포도들 중에 단 한 가지만을 사용하거나 아니면 여러 포도를 섞어서, 즉 블렌딩을 하여 만든다. 블렌딩을 한다고 하니 마치 진지한 연금술사의 연구실을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원시인이 제일 처음 마신 와인도 블렌딩한 와인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동굴 혹은 거주지 앞에 원시적으로 펼쳐 있었던 포도밭에서 어떤 것이 카베르네 소비뇽이고 어떤 것이 피노 누아인지 도저히 구분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다양한 포도들의 차이를 알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우선 색깔이 다른 적포도와 청포도의 차이를 제일 먼저 알게 되었을 것이고, 점차 포도가 익는 속도가 빠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병충해에 강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전자 기술이 발달하면서 거꾸로 과거에는 서로 다른 포도라고 알고 있었던 것들이 실제로는 같은 포도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어떤 포도원들은 원시인들과 비슷한 처지에서 와인을 만든다. 같은 포도밭에 다양한 포도가 심어져 있고 한꺼번에 추수하고 모두 섞어서 와인을 만든다. 이렇게 하는 편이 와인을 만들기 훨씬 편하며, 운이 좋으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만들었다는 전설적인 와인을 똑같이 재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뒤죽박죽이 되어 있는 포도밭에서 서로 다른 포도를 구분하여 따로 양조를 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동기 부여가 필요하다. 예를 들자면, 프랑스 부르고뉴에서는 피노 누아만을 가지고 적포도주를 만든다. 원래 부르고뉴 지역은 시토 수도원같이 카톨릭의 유명한 수도원들의 본당이 위치한 곳으로 이 지역의 와인도 수도승들의 노력에 의해 발전했다. 수도승들은 와인이 그리스도의 피라고 믿었으며, 좋은 와인을 만드는 것이 천당에 가는 지름길로 믿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수도승들은 그리스도의 피에 다른 것이 섞이는 것을 불결하게 생각했으며 그로 인해 부르고뉴 지역에서는 적포도주를 만들 때 피노 누아라는 한 가지 포도 품종만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치를 좋아하는 에릭 콜러

반면 보르도 와인은 적포도주와 백포도주 모두 2가지 이상의 포도를 블렌딩하여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보르도에서 서로 다른 포도들이 한 포도밭에 섞여 있는 경우는 보기 힘들다. 고급 와인을 만들수록 그리고 최근에 조성된 포도밭일수록 서로 다른 포도를 따로따로 심고 양조하여 숙성과정에서 블렌딩을 한다. 최고급 와인을 만들 경우에는 같은 포도 품종이라도 또 다시 포도밭에 따라 따뜻한 포도밭에서 자란 포도, 자갈이 많은 포도밭에서 자란 포도 등을 세밀하게 나누어 각각 서로 다른 환경에서 양조를 하는 경우도 있다. 한 가지 요리를 만들 때에도 각 재료를 따로 손보는 것과 비슷하다. 특정한 포도밭에서 나온 포도가 월등하게 품질이 좋을 경우, 이 포도만 가지고 따로 와인을 만드는데 이런 와인을 ‘싱글 빈야드’ 와인이라고 부른다.

보르도 와인을 만드는 데에는 6개의 적포도와 8개의 청포도를 사용할 수 있지만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각각 2~3가지 정도다. 적포도주를 만들 때는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메를로(Merlot), 카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 쁘띠 베르도(Petit Verdot), 카르메네르(Carmenere), 말벡(Malbec)이 사용된다. 하지만 6개의 포도 중에 뒤의 3개는 사용되지 않거나 사용되더라도 아주 작은 비율로 블렌딩되며 그나마 재배 면적도 점차 작아지고 있다. 최근 들어 재배 농가가 늘어나고 있다고도 하지만 대세에 영향을 줄 정도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보르도 지역에서 다양한 포도를 사용하게 된 이유는 기후와 병충해를 비롯해 매년 변하는 재배 환경에 적응력이 다른 포도를 사용하여 전체를 잃어버릴 확률을 줄이기 위해서라는 얘기도 있다. 기후 변화에 대한 대응력이 커진 오늘날, 점차 사용되는 포도의 수가 적어지는 것이 설명이 된다. 그렇다고 해도 보르도 와인이 ‘블렌딩의 와인’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보르도 지역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지롱드강(Gironde)을 중심으로 서쪽에서는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 동쪽에서는 메를로와 카베르네 프랑을 주로 사용한다. 만화 <신의 물방울>에도 소개된 적이 있는 샤토 보이드 컹트낙(Chateau Boyd Cantenac)의 소유주 뤼시앙 기유메(Lucien Guillemet)는 내게 와인의 블렌딩에 대해 다음처럼 이야기한 적이 있다.

“메를로 포도만을 가지고 와인을 만들면 처음 와인을 오픈했을 때 곧바로 향기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5분도 지나지 않아서 그 향기를 잃어버린다. 반대로 카베르네 소비뇽만 가지고 와인을 만들면 처음에는 아무 향기도 보여주지 않지만, 한번 자기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하면 1시간 이상 지속된다.
내가 와인을 만드는 것은 서로 성격이 다른 포도를 사용하여 아름다운 합주곡을 만드는 것과 같다.”

많은 와인 애호가들이 처음 와인을 시작할 때 포도의 이름을 외우고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우리가 악기의 이름을 몰라도 록밴드나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와인의 모든 것들이 ‘조화’와 ‘균형’을 위한 것이라는 원칙만 이해한다면, 한두 가지 포도품종만 알아도 와인의 오케스트라를 즐기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90호 (2018년 0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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