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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기니 관심받네”…‘고프코어(gorpcore)’ 패션이 대세
기사입력 2018.04.04 11:2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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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멍의 2018년 봄·여름 시즌 컬렉션 룩북

촌스러움이 멋스러움으로 평가받는 ‘어글리 프리티(Ugly Pretty·못생김이 곧 예쁨)’ 시대가 열렸다.

최근 패션계에서 트렌드로 뜨고 있는 일명 ‘못난이 패션’을 뜻하는 얘기다. 깔끔하고 세련된 기성 옷차림 대신, 패션에 전혀 신경을 안 쓴 듯한 촌스러운 컬러와 뜬금없는 의상으로 개성을 어필하는 모습.

그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힘들었던 하이엔드 패션 트렌드야 종종 있었지만, 이번 트렌드는 이를 넘어 아예 ‘안티 패션’ ‘패션 테러리즘’을 장려하는 듯한 모양새다. 가령 프랑스 명품 브랜드 베트멍(Vetements)의 2018년 봄·여름 시즌 컬렉션 룩북은 일반인이 보기에 ‘이게 뭐야’ 싶은 의상으로 도배돼 있다. 구두까지 좍 빼입은 캐주얼 정장 위에 맥락 없는 우비를 걸치거나, 형형색색 스커트·하이힐과 둔탁한 등산복을 매칭해 놓는 식이다. 여기에 유머 사진을 보는 듯 우스꽝스럽게 과장된 모델들의 포즈가 화룡점정을 찍는다.

패션업계에서는 이 같은 트렌드를 일명 ‘고프코어(Gorpcore)’라는 전문용어로 부른다. 야외 활동에서 간식으로 많이 즐겨 먹는 그레놀라(G), 오트(O), 레이즌(R), 피넛(P)의 앞 글자를 딴 단어 ‘고프(Gorp)’에서 유래했다. 원래 야외 활동·캠핑을 갈 때 먹는 견과류 간식을 통칭하는 말이었지만, 아웃도어 의류를 지칭하는 말로도 쓰인다. 단어 유래에서 보듯, 고프코어는 기본적으로 바람막이 점퍼·재킷·등산복·우비 등 야외 활동 용품을 ‘엉뚱한 방식’으로 활용한 데서 출발했다. 이들 제품이 보유한 투박함과 편안함에 착안, 실용성 이외의 다른 요소-조화로운 색감, 실루엣, 세련미 등-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의도된 부조리’ 연출에 쓴 것이다.

발렌시아가의 2018 봄·여름 시즌 컬렉션, 발렌시아가의 2017 가을·겨울 시즌 남성복 컬렉션

고프코어를 일명 ‘마운틴 시크(Mountain chic·시크한 등산복 룩)’ ’캠핑 글램(Camping glam·매력적인 캠핑 의상)’ 등으로 지칭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노스페이스·파타고니아 등 유명 아웃도어 브랜드에서 나온 퍼프 재킷(Puff Jacket·보온성을 강조한 풍성한 재킷), 패딩 조끼, 등산 양말과 등산화, 샌들, 힙색을 뜻하는 패니 백(Fanny Bag) 등이 대표 아이템으로 언급된다.

영국 패션 편집숍 ASOS의 수잔나 터커(Susannah Tucker) 시니어 에디터는 “영하의 날씨 속에서 눈발을 뚫고 이웃집을 찾아가거나, 캠프를 차리고 불을 피울 때 입는 기능성 의류를 일상에 끌어온 게 고프코어”라며 “그 결과 전혀 스타일리시하지 않은 의상만큼 스타일리시한 게 없다는 아이러니가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고프코어는 본질적으로 세련된 스커트와 ‘삼선 슬리퍼’를 매칭하건, 풍성한 패딩 아래 반바지를 입건 조화에는 일절 신경 쓰지 않는 룩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개성을 좇는 오늘날 오히려 ‘어글리 프리티’라는 역설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이는 수년째 패션계를 휩쓸고 있는 레트로(복고) 무드, 3년여 전부터 인기를 끌어 왔던 ‘놈코어(Normcore)’ 트렌드가 결합해 나타난 합성물이기도 하다. 놈코어는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스타일’을 지칭하는 말로, 운동복과 같은 일상복을 입되 개성 넘치게 활용하는 스타일이었다. 여기에 복고 무드가 더해지며 보다 촌스럽고 오래돼 보이는 아이템을 ‘무심하게’ 입는 고프코어가 완성됐다.

프라다가 지난해 출시한 컬렉션에서 선보인 고프코어룩

이처럼 ‘안티 패션’에 가까운 고프코어 트렌드를 콧대 높은 프라다·구찌·발렌시아가 등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가 이끌었다는 점도 역설적이다. 유행을 주도한 명품 브랜드로는 베트멍과 함께 발렌시아가(Balenciaga)가 꼽힌다. 발렌시아가의 2018 봄·여름 시즌 콜렉션은 정장과 아웃도어 등산복, 아노락(Anorak, 방한에 중점을 둔 후드 달린 바람막이 재킷) 등 ‘깨는’ 의상으로 도배돼 있다. 특히 과장된 크기의 아노락은 모델의 실루엣마저 완전히 가려 ‘노숙용 의상’을 연상시키는 분위기를 풍긴다.

프라다도 지난해 봄·여름 시즌부터 고프코어를 본격적으로 반영해 왔다. 지금 당장 산에 올라도 될 듯한 형형색색 야외활동 의상을 공들여 ‘부조리하게’ 매칭한 모양새. 글로벌 패션의 정점으로 일컬어지는 명품 브랜드에게 기대하기 힘든 모습이다. 이외에 해외 유명 디자이너 마르케스 알메이다(Marques’ Almeida)가 선보인 과장된 실루엣의 퍼프 재킷, 지방시의 범백(Bum bag) 등도 고프코어를 좇은 컬렉션으로 꼽힌다.

신발 부문에서도 ‘못생긴 운동화’로 대표되는 고프코어 룩이 강세다. 발렌시아가의 ‘트리플 S(Triple S)’ 운동화는 실루엣부터 매끈함·날씬함과 거리가 먼, 뒤꿈치가 툭 튀어나온 투박한 모양새를 자랑한다. 낡은 운동화 콘셉트로 제작되다 보니, 한 번도 신지 않은 새 상품이 닳디 닳은 중고품 분위기를 풍기는 점도 이색적이다.

나이키도 지난 1998년 일본에서만 발매했던 ‘에어맥스 98’ 모델을 20년 만에 시장에 다시 내놓기도 했다. 뭉툭한 앞코와 두툼한 밑창 디자인이 특색으로, 출시 당시에는 그 투박함 탓에 ‘에어맥스’ 안에서 유독 인기가 없었다. 하지만 ‘투박함’이 중시되는 고프코어 유행에 힘입어 재발굴, 새 인기 아이템으로 조명받게 됐다. 이외 아디다스가 뮤지션 칸예 웨스트와 만든 ‘이지 러너(Yeezy Runner)’, 리복이 베트멍과 협업해 만든 ‘인스타 펌프 퓨리(Insta Pump Fury)’ 등도 대표 아이템으로 꼽힌다.

이처럼 해외 명품가, 글로벌 브랜드가 고프코어를 추구하는 이유는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 출생)’의 입맛 때문이다. 이들 젊은 밀레니얼 세대는 과거 명품이 보여주었던 권위적이고 고풍스러운,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때문에 명품 업계는 일명 ‘길거리 패션’을 보여주는 스트리트 브랜드 등 타 업계에 과감하게 손을 뻗는 등 변신을 기도해 왔다.

지난해 패션계에서 선풍적 주목을 받았던 루이 비통과 스트리트 브랜드 슈프림 간 협업이 대표적이다. ‘패션 역사에 남을 만남’이라는 대호평과 함께 전 세계 매장 앞 밤샘 줄, 품절 사태를 불렀다. 이를 통해 루이 비통은 그간 좀처럼 다가가지 못했던 젊은 세대에 어필, 길거리 무드까지 포괄하는 영(young) 브랜드의 이미지를 얻었다. 고프코어라는 명품가의 ‘무한도전’ 역시 이 같은 행보의 연장선인 셈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고프코어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을까. 아무래도 체면을 크게 따지는 국내에서는 의상 전체를 고프코어로 도배하기보다, 어글리 슈즈·아노락·힙색 등 개성을 드러내기 쉬운 단일 아이템에 주목하는 추세다. 가령 지난 2월 아식스가 출시한 ‘젤-버즈 1’ 운동화의 대성공이 대표적이다.

아식스와 세계적 디자이너 키코 코스타디노프가 손잡고 내놓은 제품으로, 영국 선발매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출시됐다. 취급 매장인 서울 청담동 분더샵 앞에는 출시 하루 전부터 고객들이 줄을 서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영하 10도를 한참 밑도는 강추위 속에서도 구매를 기다리는 팬들이 밤샘 작전을 펼친 끝에 판매 시작 15분 만에 완판됐다.

국내 브랜드 중에서는 휠라가 트렌드의 수혜를 톡톡히 봤다. 지난해 출시한 어글리 슈즈 ‘디스럽터 2’가 2월 중순 누적판매 60만 족을 넘겼으며, 같은 달 둘째 주에는 온라인 편집숍 무신사의 주간 판매 랭킹에서 2위까지 치솟기도 했다. 지난 1월 출시했던 차세대 어글리 슈즈 ‘휠라 레이’는 한 달여 만에 초도 물량이 완판돼 추가 생산에 돌입하기도 했다.

러닝을 할 때 신을 법한 투박한 외형의 스니커즈, 당장 행군을 떠나야 할 듯한 기분을 만들어 주는 워커도 고프코어의 중심에 서있다. 스케처스 스니커즈나 닥터마틴 워커는 쿨한 실루엣의 고프코어 스타일링과 잘 어우러지며 결코 어글리하다고 볼 수 없는 어글리 패션을 완성시켜 준다. 편안한 착화감도 갖추었으니 일상생활과 야외 활동을 아우를 수 있는 고프코어 필수 아이템이라 불릴 만하다.

상의 쪽에서 고프코어를 대변하는 인기 아이템은 아노락이다. 한때 ‘아재 룩’의 대표상품 중 하나로 꼽혔지만, 고프코어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으며 일종의 스트리트 패션 아이템으로 주목받게 된 것. 이에 국내 아웃도어·스포츠 업계에서는 대담한 컬러와 로고 배치로 ‘촌스러운’ 감성을 강조한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고프코어의 유래 자체가 야외 활동과 맞닿아 있는 만큼, 겨울철 롱패딩의 뒤를 이을 수 있는 ‘봄철 핫 아이템’으로 보고 주목하는 기색이다.

밀레·휠라·엄브로가 올 봄·여름 시즌 각각 선보인 아노락 재킷

최근 아웃도어 브랜드 밀레에서는 레트로 무드를 반영한 아노락 스타일의 바람막이 ‘밀레 클래식 1921 아노락’을 선보였다. 스트릿 감성의 아웃도어웨어를 표방하는 밀레 클래식 컬렉션의 신상품으로, 1921년도에 출시됐던 브랜드 오리지널 아노락 재킷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복각한 점이 특색이다. 밀레 빈티지 로고에서 영감을 받은 레드·블루·화이트 컬러에 캥거루 주머니를 연상시키는 앞판의 빅 포켓, 클래식한 로고 스티치 자수, 광택감 없는 원단을 더해 복고 무드를 완성했다.

밀레 관계자는 “로고를 숨기고 모던한 디자인을 경쟁적으로 선보이던 아웃도어·스포츠업계에서 오히려 촌스런 ‘아재 패션’에 가까운 재킷 출시에 몰두하는 것은 사뭇 달라진 풍경”이라며 “고프코어룩 열풍을 타고 아웃도어 웨어를 멋으로 착용하는 젊은 세대가 늘고 있는 만큼, 아웃도어 웨어가 트렌디하지 못하다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할 좋은 기회라고 본다”고 전했다.

‘헤리티지’를 강조할 수 있는 역사 있는 스포츠 브랜드에서도 복고풍 아노락 출시에 열성적이다. 어글리 슈즈로 재미를 본 휠라는 휠라 로고와 네이비·레드 등 컬러로 포인트를 준 ‘헤리티지 아노락’을 출시했으며, 영국 스포츠 브랜드 엄브로도 1990년대의 브랜드 헤리티지를 재해석한 ‘레트로 아노락’을 선보였다.

액세서리 분야에서는 힙색이 가장 핫한 고프코어류 아이템이다. 스포츠 브랜드 MLB는 힙색을 비롯 웨이스트백, 슬링백 등 가지각색 ‘패니 백’ 스타일 신상품을 밀고 있다. 1980~1990년도에 유행한 후 촌스러움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힙색이지만, 고프코어 트렌드로 이를 다루지 않는 해외 브랜드가 없을 만큼 인기를 끌자 다양한 신상품을 선보였다.


이외 여러 패션 브랜드들이 선보이고 있는 오버사이즈 핏의 상하의와 아우터, 강렬한 컬러의 아이템을 활용한 자유분방한 배색, 포멀한 아이템과 캐주얼한 아이템의 믹스 매치 등도 고프코어의 영향을 받은 결과물이다. 너무 크지는 않을까, 스포티하지 않을까, 격식에 어긋나지는 않을까 시도를 망설여 왔던 패션 아이템들이 있다면, 지금이 기회다. 못생기면 못생길수록 좋다.

[문호현 매일경제 유통경제부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91호 (2018년 0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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