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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보 ‘더 뉴 XC60’ 디자인한 이정현 디자이너 | “무모한 도전? 최대한 무모하게 시작했습니다”
기사입력 2017.11.03 10: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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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을 대표하는 자동차 제조사 볼보가 애지중지하는 모델 중 하나는 중형 SUV ‘XC60’이다. 그동안 글로벌 시장에서 103만9010대(올 8월 기준)나 팔렸으니 어쩌면 당연한 수식이다. 프리미엄급 브랜드가 격돌하는 유럽시장을 살펴보면 이 연산은 이미 공식이나 다름없다. 메르세데스-벤츠의 GLC, BMW의 X3, 랜드로버의 디스커버리 스포츠 등 쟁쟁한 브랜드를 제치고 중형 SUV 부문에서 2년 연속 베스트셀링카에 올랐다. 그 XC60이 최근 8년 만에 환골탈태했다. 이른바 풀체인지된 ‘더 뉴 XC60’에 자동차 마니아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이유다. 여기서 잠깐, 이 차의 외관 디자인은 볼보 최초의 한국인 디자이너 이정현 씨가 담당했다. 스칸디나비아식 디자인 DNA를 고스란히 담아냈다는 베스트셀링카의 디자이너가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스웨덴으로 유학을 떠난 한국인인 셈이다. 과연 지난 10년간 그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난 걸까.



▶XC60은 볼보의 대표 모델입니다. 이런 차의 새로운 디자이너로 선택됐을 때 어떤 느낌이 들던가요.

▷경쟁을 통해 최종적으로 제 디자인이 채택됐는데, 이겼다는 기쁨보단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어요. 볼보에서 가장 성공한 모델을 새롭게 디자인하는 작업이잖아요. 양산 과정이 끝나는 순간까지 제가 가진 모든 걸 쏟아야 한다는 마음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렇게 3년여의 시간이 흘렀는데, 모든 작업을 마치고 나니까 그때서야 실감이 나더군요. 그동안 많은 걸 희생해야 했던 스웨덴에서의 유학생활과 회사생활이 결실을 맺는 느낌이었고, 한국인으로서 볼보의 허리라 할 수 있는 모델을 디자인했다는 게 뿌듯하고 벅찼습니다.

▶어떻습니까. 그 일 이후에 사내에서 위상이 달라졌을 것 같은데요.

▷제 스스로 장점이라 생각하는 게 하나 있는데, 일이 잘됐을 때 들떠서 자만하지 않고 그렇지 않을 때 자책하지 않는 겁니다. 그저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잘하려고 해요. 그러면 결과에 상관없이 후회하지 않으니까요. 솔직히 XC60을 디자인하고 위상변화는 크게 느끼지 못하겠어요.(웃음) 물론 수많은 사항을 고려해야 하는 양산과정을 거치면서 경험과 지식을 쌓을 수 있었고 덕분에 이전보다 더 나은 디자이너가 됐습니다. 팀에서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XC60의 디자이너로서 차에 대해 강조하고 싶은 게 있다면.

▷제가 XC60의 디자인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는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의 심플하고 순수한 미학을 바탕으로 한 역동적이고 우아한 중형SUV’예요. 작은 디테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예를 들어 차량 전면부 바닥에 ‘언더쉴드’라 부르는 두꺼운 스틸 판이 있어요. 차량 배면을 보호하는데, 이 부분에도 디자인을 가미했습니다. 언젠가 정비하시는 분들이 볼 수 있는 부분이잖아요.(웃음)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공학도인데 자동차 디자이너가 됐습니다.

▷기계를 전공하고 자동차 디자인 석사 과정을 준비할 때 저 스스로도 무모한 도전이 아닐까란 생각을 수도 없이 했습니다. 보통은 전공이 다르면 학사 과정부터 다시 시작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하물며 전 석사과정을 목표로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나름 용감하고 무모한 도전이랄까. 그 당시엔 기왕 시작하는데 최대한 무모하게 해보자란 생각이었습니다. 스웨덴의 우메오 대학은 학비가 전혀 없기 때문에 경쟁률이 높았는데, 제겐 간절함이 가장 큰 무기가 아니었나 싶네요. 입학 후요? 정~말 힘들었어요. 보고 배우고 느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고, 2년의 석사 과정 동안 인간답게 살아본 기억이 거의 없을 만큼 공부와 디자인 작업에만 열중했습니다.

▶반면에 자동차 디자이너가 공학을 알면 활동 범위가 훨씬 넓어지는 것 아닌가요.

▷볼보에 입사한 후 엔지어들과의 협업에 많은 도움이 됐어요. 기계 관련 지식 덕분에 엔지니어의 입장에서 디자인을 바라볼 수 있게 되더군요.



많은 시간 보다 얼마나 효율적이냐가 우선

▶특별히 볼보를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지금은 한국에서도 북유럽 디자인이 트렌드가 됐지만 제가 유학을 준비할 땐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당시에 대학원을 알아보면서 스웨덴 디자인에 빠지게 됐는데, 그런 이유로 우메오 대학 석사과정에 지원했습니다. 스웨덴에선 유일하게 자동차 디자인학과가 있거든요. 아시겠지만 볼보는 스웨덴을 대표하는 자동차 기업이에요. 역사와 전통, 또 잠재력이 큰 볼보에서 일하고 싶어서 이곳에만 입사지원을 했고 운 좋게 근무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입사 당시 볼보의 첫 한국인 디자이너였는데, 이 또한 나름 어려움이 있었을 법합니다.

▷한국인은 둘째치고 동양인 디자이너가 단 한 명도 없었어요. 굳이 찾으라면 홍콩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영국으로 이민 간 영국인 디자이너가 전부였습니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사람들이 저만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지요. 석사과정을 밟으면서 영어로 소통하긴 했지만 언어에 대한 불편함도 있었고, 일주일에 수없이 반복되는 프레젠테이션이 있을 때면 내용뿐만 아니라 어떤 식으로 발표해야 하는지 준비해야 하는 것도 큰 스트레스 중 하나였습니다. 스웨덴의 문화나 음식, 주택난, 세금, 병원 같은 사회시스템이 학생 때 경험했던 것과는 처리해야 할 일부터 전혀 달라서 그것도 어려웠고요.(웃음) 입사 초기엔 적응한다기보단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았던 것 같네요.

▶그러게요. 해외에서 직장 생활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그럼에도 장점이 있다면.

▷전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해본 경험이 없어요. 그래서 정확한 비교는 어렵지만 주변에서 들은 내용을 짚어 보면 가장 큰 차이 중 하나가 회사 내 계급 문화더군요. 한국의 기업은 많은 직급이 있고 기본적으로 상명하복의 수직적인 구조를 갖고 있잖아요. 물론 볼보 디자인팀에도 어느 정도의 직급과 상명하복이 존재하지만 토론과 소통에 있어서 보다 자유롭다고 할 수 있어요. 직급이 많지 않으니 의견 조율이나 토론할 때 자유로운 의견 교환이 가능하죠. 디자이너들의 연령대도 대부분 30대 후반이라 팀 동료라기보다 친구라는 표현이 맞겠네요.

▶그렇더라도 뭔가 무언의 법칙이 있을 것 같은데요. 예를 들어 회식이라든지.

▷상사가 퇴근하기 전에 퇴근해선 안 된다거나 회식에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식의 법칙은 없다. 회식은 1년에 한두 번 정도 있는데 참석 여부는 개인의 자유예요. 아, 그렇다고 무조건 스웨덴에서의 직장생활이 좋다고 포장하는 건 아닙니다. 모든 것이 그렇듯 일장일단이 있어요. 언어, 음식, 문화, 교육, 병원, 교통, 물가, 사회시스템 등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 많고 무엇보다 한국이 그리울 때가 많지요.

▶직업인으로서 자동차 디자이너의 일상도 궁금한데요.

▷출퇴근 시간은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에요. 칼 출퇴근이란 개념은 없습니다. 물론 9시 이전에 출근해야죠. 하지만 ‘얼마나 오랫동안 회사에 있느냐’보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일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업무의 경중에 따라 5~6시간 일하고 퇴근하는 경우도 있고, 밤새우는 경우도 종종 있거든요. 물론 야근이나 주말 근무는 회사도 그렇지만 국가 차원에서 권하지 않는 편이에요. 반면에 디자인 업무의 특성상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만족스러운 디자인이 나올 때까지’ 디자인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죠. 디자인 팀 내에서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경쟁입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일반적인 경우 스케치 경쟁을 통해서 어떤 디자인 주제가 각각의 차량에 적합한지 다양한 실험과 시도를 병행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친 후 품평을 통해 실제 차 ¼ 크기의 클레이 모델로 발전시킬 디자인 안들을 선별하죠. 이후 최종적으로 하나의 디자인 주제를 정하면 본격적인 양산 작업에 진입합니다. 일하지 않을 때요? 스웨덴은 자연 환경이 정말 좋아요. 비가 오지 않으면 무조건 자연으로 나갑니다. 낚시, 캠핑, 바비큐까지 자연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주로 하는 편이에요.



디자이너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잘 듣는 것’

▶디자이너로서 자신만의 경쟁력을 꼽는다면.

▷전 여러 면에서 하이브리드라고 생각합니다. 기계를 아는 디자이너는 많지 않거든요. 디자이너로서 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제 디자인이나 다른 이의 디자인을 볼 수 있는 시야가 저만의 경쟁력 아닐까요. 또 한국에서 30년 가까이 살았고, 이후 10년간 스웨덴에 살면서 한국적인 아름다움과 스칸디나비안의 아름다움을 잘 알게 됐습니다. 거창하게 말하면 동서양의 조화랄까.(웃음)

▶흔히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이란 말을 하는데, 볼보의 디자인 방향성은 무엇입니까. 둘 사이가 뭔가 다르기도 한 겁니까.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철학은 볼보 디자인 철학과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을 중심에 두고 보다 심플하면서 실용적인 디자인을 추구하는 본질이 같아요. 볼보의 디자인은 프리미엄 브랜드로서 역사와 전통 그리고 DNA를 모든 모델에 동일하게 적용하되 각 시리즈 별로 각각 다른 개성과 메시지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여타 경쟁 브랜드와 가장 큰 차별성이자 디자인 방향성이죠.

▶자신만의 디자인 방향성도 있을 텐데.

▷스웨덴에는 ‘라곰(Lagom)’이란 단어가 있어요.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알맞은 정도를 뜻하는데, 스웨덴 국민들의 문화와 국민성을 표현할 때 자주 등장합니다. 스웨덴 사람들은 소위 튀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각자의 개성을 강조해 보다 단정하고 성숙한 미를 추구하죠. 이런 미의 가치가 스웨덴과 볼보의 디자인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제 디자인의 방향성도 볼보의 그것과 흡사하죠. 비움의 미학, 더 이상 덜어낼 수 없을 만큼 덜어냈을 때 완성되는 궁극적인 아름다움이 제가 추구하는 디자인이에요. 이러한 디자인이 시간이 갈수록 가치를 드러내는 디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자인 경영이 화두인 시대죠. 무지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자동차에서 왜 디자인이 중요한 겁니까.

▷‘자동차의 기술이나 사양, 안전 등의 요소들은 상향평준화가 됐고, 차별화를 위해 디자인이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다’라는 식의 말은 저 역시 많이 접해봤습니다.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전 좀 다르게 답하고 싶어요. 사람들은 왜 끊임없이 아름다워지려고 노력할까요. 왜 새로운 옷, 신발, 액세서리 등을 구입할까요. 왜 늘 새로운 집, 새로운 인테리어를 원할까요. 아름다운 걸 원하고 새로운 걸 동경하는 건 인간의 본성입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죠. 사람들은 늘 아름답고 새로운 자동차를 원합니다. 그러니 디자인이 중요할 수밖에 없어요.

▶디자이너로서 꼭 갖춰야 할 덕목은 무엇입니까.

▷그런 덕목을 제가 갖추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웃음), 디자이너가 필요로 하는 요소는 굉장히 많습니다. 창의력, 사물을 다양한 각도로 바라볼 수 있는 시야, 좋은 비율과 조화에 대한 감각, 스케칭, 3D, 커뮤니케이션, 프레젠테이션 등의 기술, 엔지니어링에 관한 지식 등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예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잘 듣는 것’입니다. 디자인에 대해 지나치게 자신하다 보면 자칫 자만이 되고 아집이 생겨 다른 사람의 의견은 틀렸다고 생각하거든요. 디자이너는 사람들이 원하는, 나아가 그 이상을 제시하는 사람이에요. 잘 듣고 수렴하고 이를 적용하는 직업입니다. 물론 모든 이의 의견을 듣고 수렴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필터링을 거쳐 선을 확실히 할 시점이 분명히 있어요. 그 선을 언제 어디에서 그어야 하는지 제대로 아는 것 역시 잘 듣는 것과 함께 갖춰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차기작이 기대되는데. 현재 작업 중인 프로젝트는 무엇입니까.

▷현재 진행하고 있는 양산 프로젝트는 V40 디자인입니다. 그 외에 앞으로 출시 계획이 있는 프로젝트의 디자인 경쟁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친환경차에 대한 관심이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내연기관 자동차의 종말이 디자인에도 영향을 미칠 것 같은데, 변화를 예상한다면.

▷내연 기관을 사용하지 않는 자동차의 디자인은 당연히 달라야죠. 심해에 사는 물고기의 경우 눈이 필요 없으니 퇴화되고 없잖아요. 친환경 자동차 디자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필요 없는 부분은 유지할 이유가 없겠죠. 다른 용도로 그 쓰임이 바뀔 순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내연기관 자동차는 그릴이 필요하지만 전기차는 배터리나 모터를 냉각시킬 정도의 공기 유입만 있으면 되니 그릴 크기가 줄어들 수도 있고, 자율주행에 필요한 각종 센서들을 배치해 현재 크기를 유지할 수도 있겠지요. 볼보의 차체는 전기차를 고려한 플랫폼이에요. 전기차가 필요로 하는 각종 요소들을 디자인적으로 보다 더 모던하고 아름답게 풀어내기 위해서 엔지니어들과 많은 협업을 하고 있습니다.

[안재형 기자 사진 볼보자동차그룹]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86호 (2017년 1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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