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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마음산책] 베틀, 화로, 취떡, 조청, 석류…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겨울 풍경들
기사입력 2021.01.07 15:30:17 | 최종수정 2021.01.07 15:3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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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은 참으로 길다. 그 긴 겨울밤 우리는 잠을 자지만, 어머니는 밤에도 어두운 호롱불 아래에서 일을 하신다. 겨울밤 어머니가 하시는 일 가운데 아직도 가물가물 떠오르는 것이 어머니가 직접 베틀에 앉아 베를 짜고, 또 베를 짤 실을 마련하기 위해 삼을 삼는 모습이다. 어머니는 치마를 걷은 무릎에 삼베 올의 양쪽 끝을 비벼 연결해 삼을 삼는다. 부엌 가마에서 쪄낸 삼 줄기를 가늘게 찢어 그것을 실처럼 길게 이어붙이는 작업이다. 다들 설 전에 일을 끝냈으면 싶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

그때는 어머니가 밤늦게까지 일을 해도 어머니는 으레 그렇게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고도 어머니는 아침에 식구들 가운데 제일 일찍 일어나 통 바람이 그대로 들어오는 부엌에 나가 아침 준비를 하고 소여물을 끓인다.

지금은 그때 어머니가 쓰시던 베틀이 어디에 가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 이제는 쓰지 않는다고, 버렸거나 용케도 남은 것들은 박물관에 가 있거나 어디 전시장 같은 곳에 가 있다. 베틀이야말로 서로 빌려 쓰는 물건이 아니라 집집마다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구경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소여물을 끓여 담아주는 구유 역시 시골 외양간에 있던 것이 어느 고급 한정식집의 식탁 노릇을 하거나 큰 거실의 탁자 노릇을 한다.

옛 기억 속에 어머니는 늘 바빴다. 잠시 그냥 앉아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겨울에 눈이 오면 좀 한가한 듯 싶어도 큰 명절로 설날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어머니들은 다시 바빠진다. 지금은 명절에 쓸 거의 모든 음식을 시장에서 사서 쓰지만 설에 쓸 음식을 하나하나 집에서 준비해야 한다.



그 가운데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아마 엿을 고는 일이 아닐까 싶다. 쌀엿을 고기도 하고 강원도에 많이 나는 옥수수엿을 고기도 한다. 밀의 어린 싹을 내어 단맛을 내는 ‘질금’도 이제는 정말 보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질금이라는 말을 아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엿은 가마솥에 하루 종일 곤다. 절반은 엿으로 만들고, 절반은 손끝으로 찍으면 쭉쭉 늘어나는 조청으로 만든다. 꿀도 귀하고 설탕도 귀하던 시절이라 떡을 묽은 조청에 찍어 먹었다.

떡도 여러 종류를 만든다. 우선 함지 가득 인절미를 만들어 광에 보관하고, ‘절편’이라고 부르는 흰 쌀떡도 한 함지 만들고, 또 같은 쌀떡이어도 떡국으로 쓸 가래떡도 한 함지 손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겨우내 간식으로 먹을 ‘취떡’을 만든다. 취떡은 쌀떡에 취를 넣어 색깔이 쑥떡보다 조금은 검게 난다. 또 모든 떡을 귀한 쌀로만 만들 수 없으니까 수수를 넣고 좁쌀을 넣은 ‘도움떡’도 한 함지 만든다.

이런 떡들을 한겨울 동안엔 지금 냉장고 속보다 더 기온이 낮은 광에 보관한다. 이 떡을 담았던 나무 함지도 가볍고 쓰기 편한 플라스틱 대야가 나오면서 다 사라지고 말았다. 남은 것들도 박물관이나 민속품 전시장에 가야 겨우 구경하는 정도다.

대관령 산촌에서 따로 가게도 없고, 주전부리할 것도 없던 시절 형제들이 화롯가에 모여 앉아 자주 떡을 구워먹었다. 화로 위에 석쇠를 얹고 그 위에 바짝 얼고 굳은 떡을 올려놓고 그것이 따뜻하게 풀어지길 기다린다. 꿀은 예나 지금이나 귀해서 구경하기가 쉽지 않고 조청 한 종지 떠 와서는 그걸 찍어먹는다.

어디 그뿐인가. 흙벽으로 쌓은 헛간 안쪽에는 겨우내 또 하나의 간식거리들이 담겨 있는 등겨가마니들이 놓여있다. 사과를 담아놓은 등겨가마니와 연시를 담아놓은 등겨가마니, 그리고 석류를 담아놓은 등겨가마니다. 지금은 이런 가마니도 보기 어렵다. 사과도 연시도 석류도 그걸 그냥 그것만 두어서는 오래 보관할 수 없다. 그것들은 등겨가마니 속에 넣어두어야 얼지도 썩지도 않고 한겨울을 난다.

형제들 중 누가 감기라도 걸려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 할아버지가 제일 큰 형에게 이른다.

“헛간에 가서 석류 한 알 내오너라.”

그러나 겉보기엔 탐스러워도 막상 속을 갈라보면 다른 과일보다 빈약한 게 석류다. 요즘 해외에서 들어오는 석류처럼 속이 꽉 차 있지 않다. 지금처럼 속이 꽉 찬 석류는 어른이 되어서야 보았다. 석류를 가져오게 하는 심부름도 할아버지만 시킬 수 있다. 어버지도 어머니도 석류 가마니는 할아버지의 분별로 남겨두신다.

사랑방 화롯가에 제비 새끼들처럼 들러붙어 앉아 “저요, 저요” 하고 손을 내미는 어린 손자들 손바닥에 할아버지는 앵두보다 더 작고, 앵두보다 더 먹을 게 없는 과육 몇 점씩을 떨구어준다. 그러나 그 향긋하고도 새콤한 맛을 어느 과일이 따라올까. 참 이상하게도, 그 석류 몇 알 받아먹는 것만으로도 우리들의 기침은 이내 멎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형제들이 돌아가며 감기를 앓았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돌아가며 당번을 정해서 할아버지 앞에 응석 기침을 했던 것 같다.

얼마 전 집 앞 마트에 갔다가 석류가 보이기에 박스 채 사왔다. 아내는 한꺼번에 그렇게 많이 사서 무얼 하느냐고 하지만,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 이 과일 하나에 우리 형제들 모두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어린 시절 겨울밤의 추억이 다 들어 있는 것이다. 과일 하나, 음식 하나 속에도 저마다 통과해온 시간이 있는 법이다.

곶감은 오래 보관할 수 있지만, 냉장 냉동시설이 좋지 않아 연시는 지금처럼 오래 보관할 수 없다. 음력 설 지나서까지 보관하기 쉽지 않지만 등겨 속이나 소나무 검불 속에서는 얼지도 썩지도 않고 대보름 차례 상에 오른다.

시골 설날의 축제기간은 해가 바뀐 설날뿐 아니라 설에서 보름에 이르기까지 장장 보름동안이나 길게 이어진다. 이 기간 동안엔 정말 집에서 할 일이 없다. 농한기라도 가장 완벽한 농한기가 바로 이 시절이다.
어머니를 뺀 아버지도 이 시기에는 한가하고 아이들도 그렇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50년이 되는 어린 날의 동창 친구들은 지금도 그 시절의 겨울 이야기를 한다. 그때 우리의 간식을 굽던 화로들은 다 어디 갔을까. 또 떡을 올려놓던 석쇠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 시절 음식 추억 속으로도 이렇게 인생은 지나가는 것이다.

[소설가 이순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24호 (2021년 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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