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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마음산책] ‘강릉 바우길’ 산길을 걸으며
기사입력 2020.06.04 15: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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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코로나19 때문에 사람 많이 모인 곳에 가기가 두려워 혼자거나 둘이, 또는 마음 맞는 몇몇이 호젓하게 산길을 걷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저야말로 10여 년 전부터 ‘강릉 바우길’이라는 산길 걷기를 지금까지 틈날 때마다 해오고 있습니다.

저는 스물여섯 살, 군대를 제대한 다음 배낭을 져본 적이 없고, 워커를 신어본 적이 없고, 등산복을 입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쩌다 ‘강릉 바우길’을 탐사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말년에 병석에 누워계실 때 병원에 가면 저는 늘 아버지의 발뒤꿈치를 쓰다듬어 드리고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의 발뒤꿈치를 어루만질 때 헐렁한 환자복 사이로 아버지의 흰 종아리가 보였습니다. 그때 84세의 아버지는 종아리뿐 아니라 앞부분 정강이와 무릎에도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셨습니다.

천자문에 보면 ‘공유국양 기감훼상(恭惟鞠養 豈敢毁傷)’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보살펴 길러주신 은혜를 공손히 생각하면 이를 어찌 함부로 헐고 다치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주신 몸을 돌아가실 때까지 조금도 다치지 않게 잘 관리하셨다는 뜻이지요. 효도의 기본이 어른들에게 무얼 해드리는 게 아니라 우선 자신의 몸을 잘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반바지를 입고 제 다리를 내려다보면 무릎 아래로 상처가 많습니다. 제 다리에 난 상처의 90%는 강릉 바우길을 탐사하며 얻은 상처입니다. 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을 다녀온 강릉 선배님들이 저에게 그 일을 맡겼습니다. 저는 그때 길을 탐사하며 제 몸에도 상처를 만들면 안 되지만, 걷는 길을 탐사한다는 핑계로 자연에도 상처를 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함께 걷는 길을 탐사하는 이기호 탐사대장과 그것 한 가지는 의견 일치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길을 탐사하되 그걸 핑계로 절대 자연에 죄를 짓지 말자. 가장 바른 길을 내자. 걷는 길이 자연친화적이어야지 자연에 피해를 주는 길이면 만들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함께 하였습니다. 바우길을 탐사할 때 서울에서 강릉으로 오가는 차비, 점심값 말고, 길 위의 시설비로 제가 돈을 들인 것은 전체 비용 5만4000원이었습니다. 강원도는 겨울에 눈도 많이 오는데 눈길에 언덕길을 오를 때 붙잡고 오를 나일론 밧줄 값이었습니다.

그리고 탐사대를 자원봉사 체제로 운영하였습니다. 지역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앞장서서 길을 찾고 또 길을 걸으면 많은 분들이 따라하지 않겠는지요. 그래서 지역 대학교의 총장님과 지역사회에서 가장 큰 병원의 원장님, 지역사회의 변호사님, 초·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이 함께 길을 냈습니다. 1년에 몇 번 갖는 걷기대회 때, 이런 분들이 자원봉사로 나오니까 일반시민들이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바우길 자원봉사를 할 수 없느냐고 오히려 문의할 정도였습니다. 자원봉사를 나오면 누구든 배낭에 자기가 먹을 밥을 싸와야 합니다.

찻길 위의 자동차는 좋은 차도 있고, 그보다 못한 차도 있지만, 걷는 길은 그런 점에서 참 평등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저마다의 체력 차이 정도인데, 하루 정도 걷는 거리를 가지고 체력 차이를 따질 정도는 아니어서 모두 함께 즐겁습니다.

우리가 길을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발로 걸어서 장소를 이동하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운동의 의미만도 아닙니다. 오래 길을 걷는 것은 신체의 지구력과 함께 사고의 지구력을 길러줍니다. 걸음이 시작될 때 생각이 시작되고, 걸음이 끝날 때 생각이 끝나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한 생각이 정리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여기저기 트레킹 코스를 걷다보면 지자체가 넉넉한 예산을 들여서 새로 단장한 길에도 가게 됩니다. 걷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그렇게 했겠지만, 때로는 그게 지나쳐 너무 많은 시설물의 폐해를 느낄 때도 있습니다. 왜 이렇게 걷는 길 위에 시설물들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다니는 길은 어디나 조금씩은 불편하기 마련입니다. 걷는 것 자체가 자동차로 이동하는 것에 비하면 불편한 것이지 길이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42.195㎞를 달리는 마라톤은 세계적인 마라톤 선수들에게도 어려운 코스입니다. 평지라도 자동차로 이동하는 것보다 걷는 것이 불편하고, 그게 언덕길이면 누구에게나 다 쉽지 않습니다. 잘 걷는 사람에게도 어렵고 못 걷는 사람에게도 어려운 것이지요. 준비운동 없이 운동장 나오는 사람처럼 걷는 것도 평소 어느 정도 훈련이 되어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길이 불편해서 자기가 잘 못 걷는 줄 압니다.

산길과 언덕길이 대표적이지요. 그런데 산길과 언덕길을 오를 때 여기에 계단을 놓으면 좀 쉽게 오를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거기에 계단을 만드는데, 계단을 만든다고 언덕길을 쉽게 올라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계단은 에스컬레이터가 아니거든요. 모든 언덕길은 다 조금씩 어렵습니다. 걷기 전문가들에게도 어렵고 초보에게도 어렵습니다. 자꾸 걷다보면 다리에 힘이 붙어 조금 쉬워지는 것이지요.

걷는 길 중간 중간 휴식처로 벤치와 탁자가 필요한 곳도 있습니다. 그런데 트레킹 코스를 걷다보면 이게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그것을 설치하는 사람들이 설치하기 편한 곳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걷다보면 자연 속에 하룻밤 야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요즘 텐트를 보면 아주 좋습니다. 봄, 여름, 가을에는 말할 것 없고, 혹한에서도 야영이 가능할 만큼 방한 기능도 좋고 성능도 좋습니다. 침낭도 집에서 사용하는 이불 이상으로도 좋습니다. 이런 야영객을 위해서 텐트 칠 자리에 미리 마루를 깔아 시설해놓은 곳도 많습니다. 저는 이게 과연 옳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야영은 자연과 함께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문명의 일상에서 벗어나 며칠 혹은 하루라도 주어진 여건 속에서 불편함을 감수하며 자연과 함께하는 일입니다. 안전과 불편은 다릅니다. 저는 걷는 길 위의 불편을 해소해주고 해결해주는 게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친화적이라는 말은 자연이 주는 불편함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 받아들이고 감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의 불안 속에 보다 안전한 자연을 찾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이 기회에 많은 분들이 자연친화적인 생각을 가졌으면 하고 바랍니다.

[소설가 이순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7호 (2020년 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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