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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마음산책] 대추나무는 왜 겨울잠을 오래 잘까
기사입력 2020.05.07 11: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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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역시 매서운 추위와 눈의 계절이지요.

봄도 한중간에 와 산과 들이 푸르러지고 있는데 왜 갑자기 계절에 맞지 않게 겨울 이야기를 하느냐고 의아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나무의 겨울잠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서울의 눈은 제 고향 강원도만큼 많이 내리지 않아도 한번 내릴 때마다 도로를 꽁꽁 얼게 하고, 길옆에 선 나무들에게 하얗게 눈꽃을 피우게 합니다. 눈이 온 날 아침 방안에서 문을 열고 바라보면 아파트 정원의 작은 나무들의 풍경이 은백의 세계를 이룹니다. 그런 한겨울에 나무들은 깊은 겨울잠에 빠져 있습니다.

저는 봄이든 여름이든 어디서나 나무들의 풍경을 볼 때마다, 특히 아파트 정원의 나무나 남의 집 마당가에 선 나무들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참으로 많은 나무를 마당과 텃밭과 집 주위에 심었습니다. 꽃나무를 심었던 게 아니라 대부분 과실나무를 심었습니다.

앵두나무, 벚나무, 체리나무, 매화나무, 살구나무, 자두나무, 복숭아나무, 포도나무, 사과나무, 배나무, 밤나무, 대추나무, 호두나무, 산수유나무, 감나무, 모과나무, 고욤나무, 석류나무…. 지금도 아버지가 계시는 우리 시골집 마당가와 텃밭에 있는 나무들입니다.

지금 내가 이름을 부른 저 나무들은 봄에 꽃이 피는 순서보다 한 해 동안 열매가 익는 순서를 따라 부른 것입니다. 꽃이 피는 순서는 매화가 먼저지만 익는 것은 언제나 그보다 작은 앵두와 버찌가 먼저지요. 산수유도 꽃은 이른 봄에 노란 카스텔라처럼 아주 일찍 피어나지만 열매는 한가을이나 되어야 빨갛게 익습니다.

오늘은 나무들의 겨울잠 이야기를 한번 해보지요. 사람이든 나무든 부지런한 사람들과 부지런한 나무들이 일찍 일어납니다. 봄이 되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순서를 봐도 그렇습니다. 매화가 그렇고 벚나무가 그렇고 진달래며 개나리, 복숭아, 살구꽃이 그렇지요. 그런 나무들은 대부분 잎보다 꽃을 먼저 피웁니다. 어쩌면 나무 중에 가장 일찍 겨울잠에서 깨는 나무는 버드나무가 아닌가 싶습니다. 버드나무는 가을에도 다른 나무들이 다 잎을 떨군 다음에도 마지막까지 푸른 기운을 유지하다가 11월이 되어야 비로소 잎을 다 떨어뜨리고 겨울잠에 듭니다. 그리고는 한겨울 자기 발밑으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려도 봄인가보다 하고 깨어나 꽃을 피웁니다. 버들강아지가 바로 버드나무의 꽃인 거지요.

그런데 그런 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잎을 피운 다음에도 여전히 자기 혼자 세상 모르게 겨울잠을 자는 듯한 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나무는 겨우내 얼어 죽은 게 아닌가 하고 가지를 꺾어보게 하는 나무가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의 마당과 아파트 단지 여기저기에 심어진 대추나무입니다.

가지를 꺾어보면 어김없이 그 나무줄기에도 물기가 흐릅니다. 죽지 않았다는 얘기지요. 그런데도 4월 말이나 5월 초쯤 되어서야 뒤늦게 겨울잠에서 깨어나 잎을 피웁니다. 우리 사람들의 구분으로 보면 아주 게으르기 짝이 없는 나무지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늦게 겨울잠에서 깨는 대추나무를 다른 나무들을 모두 깨워 일으켜 세운 다음에나 비로소 자신의 잎을 낸다고 하여 점잖은 양반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그렇지만 이 대추나무는 뒤늦게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대신 늦봄부터 늦여름까지 1년에 세 번 꽃을 피워(초여름에 첫 꽃이 핀 자리에 이미 열매가 어느 정도 굵어진 다음에도 한여름과 늦여름에도 쉴 새 없이 다시 꽃을 피워) 그 많은 열매들을 추석 때쯤 한꺼번에 익힙니다. 어느 해를 보더라도 대추나무가 열매를 많이 맺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감나무나 밤나무는 해걸이를 합니다. 한 해 감과 밤이 많이 열리면 다음해에는 스스로 수확을 줄입니다. 과수원의 나무들이 해걸이를 하지 않고 매년 일정한 열매를 맺는 것은 봄마다 과수원 주인이 꽃을 따주고 열매를 솎아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 기준에 따라 저 대추나무를 보고 저 나무는 겨울잠에서 늦게 깨어난다고 말하지만, 사실 긴 겨울잠을 자며 대추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충실한 여름준비와 가을준비를 하는 게 아닐는지요. 또 대추나무는 어떤 가지에서도 가지를 내밀어 모든 가지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한 세상을 살다보면 자기 재능을 일찍 꽃피우는 천재들도 있고, 비록 시작은 늦었지만 늦은 만큼 보다 크게 자신을 완성해가는 대기만성형의 대가들도 이 세상에 있습니다. 세계적인 작가들 가운데도 그런 분이 많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다른 일을 하다가 뒤늦게 글을 쓰기 시작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작가들도 많고요. 또 평생 글을 써온 작가들 가운데도 노년에 자기의 대표작을 낸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괴테도 80이 넘어 <파우스트>를 썼답니다. 저는 대추나무야말로 자기 인생에서 일찍 재능을 드러내는 천재형 나무가 아니라 오랜 시간이 흐를수록 더 빛을 발하는 대기만성형 나무가 아닌가 싶습니다.

나무를 살펴보고, 그 나무의 생태를 자기 눈으로 깨닫는 것도 재미있는 자연공부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중에 ‘일찍’의 효율로만 따질 수 없는 우리 삶의 많은 가치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제 고향집 마당가와 텃밭엔 줄줄이 대추나무가 심어져 있습니다. 처음엔 할아버지가 심었던 나무였는데, 그 나무들은 너무 오래되어 죽거나 병든 자리에 다시 아버지와 우리 형제들이 나무를 심었습니다. 돌아보니 할아버지는 나무를 통해 우리에게 인생의 많은 이야기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 종류의 나무들을 바라보면 그런 나무들의 삶도 사람의 삶과 참 비슷한 데가 많습니다. 혹 지금은 남들 눈에 겨울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눈에 잘 띄지 않고, 또 움츠려 있는 그대가 바로 이번 여름부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줄기를 내고 잎을 내고 많은 꽃을 피워 인생의 또 다른 한 시기를 준비하는 대추나무일지도 모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모두 자기 안에 큰 계획을 담은 큰 나무가 되시길 바랍니다. 이미 몇 달 동안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고 있는 코로나19도 잘 이겨내시고요.

[소설가 이순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6호 (2020년 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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