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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우의 명품 와인 이야기] 12병 들이 한 세트에 25만달러, 장기 숙성 명품 ‘폴 자불레 라 샤펠’
기사입력 2020.02.05 11:17:14 | 최종수정 2020.02.08 21:3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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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와인 생산지에서는 다양한 품종의 포도나무를 한자리에서 보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지역에 따라 심을 수 있는 포도 품종들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가령 적포도 품종의 경우, 보르도 지역에서는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 남프랑스에서는 시라나 그러나슈, 부르고뉴 지역에서는 피노 누아 정도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지역의 기후와 토양에 따른 최적의 포도 품종들이 오랫동안의 경험에 의해 선택되었으며, 동시에 프랑스 정부는 교육과 연구 목적이 아니라면 다른 포도나무를 심는 것을 규제하고 있다. 반면 관련 규정이 까다롭지 않은 미국이나 호주 같은 신대륙의 경우, 다양한 포도나무를 하나의 포도밭에서도 볼 수 있다.

나는 2007년 미국 나파 밸리의 포도 수확과 와인 양조 과정에 참여했던 적이 있다. 추수 직전 포도가 잘 익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와인 메이커와 포도밭을 둘러보곤 했는데, 다양한 포도나무가 심어진 환경이 보르도에서 공부한 내게는 몹시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와인을 만들기 좋게 잘 익은 포도들은 과일 자체로도 무척 맛이 있어서, 나파 밸리에 사는 동물들에게는 호시탐탐 노리는 간식거리가 되기도 한다. 내가 일한 포도밭에는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 그리고 시라가 심어져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유난히 시라에 동물들의 이빨 자국들이 많이 보였다. 나파 밸리의 시라 포도는 당도가 높고 사탕처럼 끈적거려서 손으로 수확하기에도 매우 불편하였다. 하지만 이런 포도로 와인을 만들면 과일 맛도 좋고 깊이 있는 맛이 나는 훌륭한 와인이 된다.



시라 포도의 원산지는 프랑스의 대도시 리옹(Lyon) 근처에 위치한 북부 론(Rhone) 지역이다. 전설에 의하면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던 한 기사가 전쟁에서 돌아와 론 계곡의 텅(Tain)이란 마을의 언덕에 작은 예배당을 짓고 그곳에서 살며 와인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텅 마을까지 오는 길에 지중해의 시라큐스(Sy racuse)에 들러 새로운 포도를 가지고 왔는데, 이것이 바로 시라 품종의 기원이 되었다고도 한다. 최근 연구에 의해 시라 포도품종은 프랑스의 자생 포도 품종으로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전쟁에서 돌아온 기사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로, 13세기 알비 십자군 전쟁에서 돌아온 가스파르 드 슈테림베르(Gaspa rd de Sterimberg)가 마을 언덕에 작은 예배당을 짓고 이곳에 살며 포도를 재배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이름은 이후 텅-레르미타주(Tain-l’Hermitage)로 바뀌었는데 레르미타주 혹은 에르미타주(Hermitage)는 프랑스어로 은자의 처소라는 뜻으로, 여전히 그 작은 예배당 건물이 포도밭 한가운데에 남아 있다. 이 건물 근처의 포도밭에서 나오는 와인들을 에르미타주(Hermitage)라고 부른다.

프랑스 정부는 1937년부터 에르미타주 관련 규정(AOC Hermitage)을 만들어, 이 와인을 보호하고 있다. 에르미타주 와인은 화이트 와인도 있으나 대부분 시라 포도로 만드는 레드 와인들이다. 에르미타주 와인은 장기 숙성이 가능하여 프랑스 최고의 고급 와인 중 하나로 여겨진다. 19세기의 유명 와인 저술가였던 앙드레 줄리앙(Andre Jullien)은 당시 프랑스 최고의 3대 포도밭으로 부르고뉴의 로마네 콩티, 보르도의 샤토 라피트 그리고 에르미타주를 꼽았다. 종종 보르도 최고급 와인에 블렌딩되기도 하였는데, 아주 오래된 보르도 와인의 레이블에 종종 에르미타제(Hermitage)란 표시가 붙어있었고 이는 에르미타주 와인이 섞였다는 의미이다.

에르미타주의 포도밭은 약 130Ha에 이르며, 샤푸티에(Chapoutier), 들라스(Delas), 폴 자불레 애네(Paul Jaboulet Aine), 장 루이 샤브(Jean Louis Chave), 텅-에르비타주 협동조합이 나누어 소유·경작하고 있다. 다행히 이들은 모두 품질을 중요시하는 회사들로 최고의 시라 와인을 만들고자 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생산자들이다. 에르미타주 와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은 폴 자불레 애네에서 생산하는 ‘라 샤펠(La Chapelle)’이라는 와인이다. 프랑스어로 예배당을 뜻하는 라 샤펠은, 이름 그대로 예배당을 지은 십자군 기사인 가스파르 드 슈테림베르와 그의 역사적 기여를 기념하는 와인이다. 이 건물과 건물의 이름에 관한 권한은 폴 자불레 애네 회사가 가지고 있으나, 사실 건물 주변의 포도밭은 경쟁 회사인 샤푸티에가 소유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라 샤펠 와인의 품질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폴 자불레 라 샤펠’ 1961년산은 역사상 최고의 에르미타주로 불리며 12병 들이 한 케이스가 2007년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병당 25만달러에 거래된 기록이 있다. 이는 역시 12병 들이 한 케이스가 23만7000달러에 판매된 1985년산 로마네 콩티를 능가하는 기록이었다.

폴 자불레 애네는 1834년 앙투안 자불레(Antoine Jaboulet)에 의하여 처음 설립되었다. 설립 초기부터 와이너리가 위치한 텅 레르미타주뿐만 아니라 북쪽으로 약 60㎞ 떨어진 코트 로티(Cote Rotie), 150㎞ 이상 떨어진 아비뇽(Avignon) 지역까지 바이어를 보내, 지역 농부들에게 포도 혹은 원액을 사서 와인을 만들어 왔다. 하지만 오랫동안 스스로 병입을 하지 못하고 벌크 형태로 보르도나 부르고뉴의 와인 업자에게 판매해 왔다. 이러한 가족의 비즈니스를 혁신적으로 바꾼 것은 바로 1935년부터 경영을 맡은 루이 자불레(Louis Jaboulet)로, 매년 점점 더 많은 와인들을 스스로 병입하고 소비자들과 고객들을 발굴해 왔다. 이후 1977년부터 경영을 맡은 그의 아들 제라르(Gerard)는 해외 고급 와인 시장을 일찌감치 주목하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고객들을 개척하였다. 그러나 1997년 라 샤펠 와인의 현신과 같았던 제라르 자불레가 1997년 55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 이후, 와이너리는 경영난을 겪다가 샴페인 출신의 부동산 업자이자 보르도의 샤토 라 라귄(La Lagune)을 소유한 장 자크 프레(Jean-Jacque Frey)에 의해 2006년 인수되었다. 그리고 현재 그의 딸인 카롤린이 와이너리를 경영하고 있다.

폴 자불레 애네가 프레 가문으로 인수된 이후 라 샤펠뿐만 아니라 다른 에르미타주 와인의 명성은 다소 부침을 겪었다. 아마도 와인의 품질이 변화했다기보다는, 많은 와인 평론가들과 컬렉터들 사이에서 라 샤펠 혹은 에르미타주 와인의 이미지는 제라르 자불레의 카리스마와 동일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그의 부재는 마치 와인의 영혼이 빠진 것 같은 느낌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라 샤펠 와인의 가장 큰 장점은 장기 숙성 능력이다. 하지만 이 장기 숙성 능력을 반대로 생각하면, 어릴 때 마시면 자신의 퍼포먼스를 모두 보여주지 못한다는 단점이 되기도 한다. 특히 최근에는 고급 와인들도 어리게 마실 수 있게 만들어지면서, 장기 숙성을 위한 와인들은 올드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 숙성 능력은 모든 와인이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최고급 와인들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다. 뿐만 아니라 라 샤펠을 포함한 에르미타주 와인들은 다른 고급 와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에 형성되어 있다. 라 샤펠은 또 한 번의 도약을 기대하며, 오랫동안 셀러링을 할 동기가 충분한 와인이다.

[이민우 와인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3호 (2020년 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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