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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마음산책] 강릉 고향집에 다녀오며
기사입력 2019.02.08 1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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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강릉과 서울 사이에 KTX가 개통된 다음엔 고향에 갈 때면 가능한 기차를 이용한다. 운전을 하지 않으니 그게 편하다. 또 자동차로 다닐 때는 언제 어느 곳에서 길이 막힐지 늘 불안하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도로가 그러하지만 떠날 때조차도 돌아올 길 막히는 것을 걱정하는 게 영동고속도로 사정이다.

그래도 겨울엔 조금 덜하다. 한 해 동안 늘 기차를 타고 다니다가 모처럼 자동차로 고향에 갔다. 올해 구순이 된 어머니도 뵙고, 가져와야 할 짐도 있어서 일부러 자동차를 운전해 떠난 길이었다. 경기가 안 좋다더니 그래서인지 대관령으로 스키를 타러 다니는 사람들도 예전만 못하다. 예전에는 겨울철 영동고속도로에는 자동차 지붕에 스키를 매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자동차들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겨울 레저의 관심이 스키에서 다른 부분으로 많이 이동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강원도 곳곳에서 겨울 축제를 벌이고 있다. 꽁꽁 언 강 위에 낚시 구멍을 뚫고 산천어를 낚는 축제도 있고, 송어를 낚는 축제도 있고, 빙어를 낚는 축제도 있고, 이름 그대로 꽁꽁 언 얼음 위에서 온갖 놀이를 즐기는 꽁꽁축제도 있다.

대관령 정상을 지날 때 자동차 외부 온도가 영하 11도를 가리켰다. 한낮 온도가 그 정도니 한밤중에는 영하 17도쯤 떨어질 테고, 강추위가 몰려오는 날이면 영하 20도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지날 때마다 느끼지만 깊은 산속에 쌓인 눈 풍경을 보더라도 대관령은 역시 대관령이다. 한여름 폭서에도 그곳은 해만 지면 별천지처럼 시원해 산 아래 20분 거리의 강릉 사람들이 열대야를 피해 침구까지 자동차에 싣고 와 잠을 자고 가기도 한다.



내 고향 집도 대관령 동쪽 산 아래 마을이다. 대관령과 강릉시내의 중간쯤 야산지대라 양지쪽은 눈이 녹고 응달쪽은 내린 눈이 봄이 되어야 녹는다. 그곳은 아주 예전 할아버지 때부터 온갖 나무들의 나라이다. 확실히 과실나무들은 다른 나무들보다 수명이 짧아 예전 할아버지가 심은 과실나무들은 거의 다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시 아버지와 우리 형제들이 심은 나무들이 우리 몸만큼 굵게 자랐다.

다음날, 모처럼 모인 형제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한 시간 정도 오래 뜰을 돌아다니며 한 그루 한 그루 나무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마당에서 쳐다보면 대관령은 흰 눈 속의 설국 같아도 햇살이 고루 퍼지면 산 아래는 기온이 10도까지 올라갔다. 마당가와 텃밭은 다른 곳보다 더 따뜻해서 매화와 산수유가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쪽은 매화가 벌써 꽃망울을 터뜨렸겠지만 이곳 대관령 아래는 또 그곳보다 봄이 늦다.

오랜만에 서툰 솜씨로 전지가위를 잡고 가지치기를 해보았다. 이럴 때마다 떠오르는 일이 하나 있다. 어린 날 할아버지가 나무의 가지를 칠 때 옆에서 그러면 나무가 아파하지 않느냐고 묻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은 가르쳐서 다듬고 나무는 가지를 쳐서 다듬는단다. 둘 다 그때는 싫고 아프겠지만, 나중에 보면 그래서 큰 재목이 되고 큰 나무가 되는 거란다.”

할아버지는 따로 공부를 하신 분도 아닌데, 낫을 잡든 괭이를 잡든 전지가위를 잡든 농사일에 대해 손주들이 물으면 일부러 그렇게 하시는 것도 아닌데 늘 철학적이고 교훈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래서 어릴 때는 그것의 깊은 뜻을 몰랐다가 어른이 된 다음 새삼 할아버지의 말씀을 다시 떠올려볼 때도 많다.

집 주변에 밤나무를 가득 심으신 것에 대해서도 “아무리 배가 고파도 밤 한 톨을 화로에 묻는 것과 땅에 묻는 것의 차이”라고 “화로에 묻으면 당장 어느 한 사람의 입이 즐겁고 말겠지만, 땅에 묻으면 거기에서 나중에 일 년 열두 달 화로에 묻을 밤이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분이다.

전지가위야 한 손에 착 감기듯 들어오는 작은 연장이지만 쟁기를 잡은 손의 옛 감각이 지난 시절처럼 되살아나는 것 같아 내친 김에 운동화를 작업 장화로 바꾸어 신고 텃밭에 나가 쇠스랑으로 땅을 찍어가며 냉이를 캤다. 보통 냉이는 봄이 오는 길목에 다른 곳보다 먼저 눈이 녹는 양지 밭으로 나가 호미로 살살 캐는데, 나는 아직 언 기운이 있는 밭을 갈아엎듯 쇠스랑으로 힘껏 땅을 쪼아 냉이를 캤다.

해마다 형님이 거름을 잘하여 저 혼자 나고 자란 냉이 뿌리가 새끼손가락 굵기만 해 다들 냉이가 아니라 열무 같다고 했다. 달래도 마트에서 파는 향기 없는 온상 달래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달래의 구슬 크기도 꼭 산마늘 같았다. 수돗가에서 지하수로 열 번 말끔하게 헹구고 손질해서 다섯 형제 모두에게 커다란 비닐 팩으로 한 보퉁이씩 올해의 봄 선물로 미리 나누어주었다.



한낮이 되자 이른 봄볕처럼 따뜻한 기운이 시골집 안팎을 둘러싸는 듯했다. 형제들 중 누군가 점심을 먹고 다들 헤어지기 전 바다를 보러 가자고 말했다. 그러자 또 한 형제가 이왕 바다를 보러갈 것이면 바닷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자고 했다. 바닷가 마을에 횟집이나 조개구이를 파는 가게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커피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것도 보기 드문 현상이다. 내 어린 시절에는 돛단배 몇 척이 있던 아주 한적한 바닷가였고, 젊은 시절에는 서울사람들로 북적이던 경포대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허름한 횟집과 소줏집이 있던 바닷가가 지금은 전국에서 이름난 커피거리로 변모해 있었다. 내가 형제들에게 냉이와 달래를 나누어준 것처럼 한 형제가 그곳에서 잘 볶은 커피를 다섯 봉지 사서 형제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보통은 형제들이 모이면 고향집 마당에서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고 저마다 도회지의 자기 터전으로 돌아오는데, 그날은 바닷가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 뿔뿔이 자기 자동차를 운전해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니 내가 사는 도시도 이곳에 내 모든 것이 있듯 넉넉하고 좋았다. 가져온 커피냄새도 좋고, 저녁 식탁에 오른 달래와 냉이냄새도 고향의 냄새처럼 좋았다.
무엇보다 그것들을 풀어놓으니 내가 고향집 마당에서 자애로운 어른들 아래 참으로 귀하게 자라 어른으로 성장하였고, 또 귀한 형제들과 함께 귀한 정을 나누고 있는 사람임을 다시 알겠다. 곧 명절이 다가온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 모든 가정이 이렇게 마음만이라도 넉넉했으면 좋겠다.

[이순원 소설가]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1호 (2019년 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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