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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우의 보르도 와인 이야기] 한식과 잘 어울리는 보르도 로제 와인 ‘클라레’
기사입력 2019.07.01 16:3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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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은 매우 전통적인 취미이자 비즈니스로 알려져 있다. 와인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일정기간의 훈련이 필요하기도 하고, 한번 만들어진 취향은 잘 변하지 않는다. 수준이 있는 와인 컬렉션을 갖추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려서, 유럽의 가족 중에서는 수대에 걸쳐 쌓은 와인 컬렉션을 자랑하는 경우도 있다. 1855년 나폴레옹 3세에 의해 만들어진 보르도 그랑크뤼 등급은 애호가들에게 와인판 미쉐린 가이드로 인정받고 있다. 이 등급은 무려 160여 년 전에 만들어졌으나 그동안 거의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매년 갱신되는 미쉐린 가이드의 레스토랑 등급과 비교가 된다. 와인 양조장은 오랫동안 차별이 존재한 곳이었다. 한동안 여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었을 뿐 아니라 양조장에서나 포도밭에서나 흑인을 찾는 것은 지금도 쉽지 않다.



▶엉프리뫼르 시음회에서 결정되는

보르도 와인의 가격

전통적인 기준에서 최고의 와인은 단연 장기 숙성형 와인이다. 나는 지난 2005년부터 매년 4월 초 프랑스 보르도에서 열리는 엉프리뫼르(En Primeur) 시음회에 참여하고 있다. 엉프리뫼르 시음회란 포도 수확과 발효를 끝내고 오크 숙성에 들어간 와인들을 출시하기 약 1년 전, 전문가들에게 공개하는 쇼케이스를 의미한다. 엉프리뫼르가 끝나면 바로 시장이 열리고 와인들은 선물(先物)로 거래된다. 시음회의 평가에 따라 가격이 정해지기 때문에, 엉프리뫼르는 보르도 포도원 주인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와인의 취향은 매우 다양하고, 서로의 다른 취향을 인정하는 것은 와인 애호가들의 중요한 미덕이기도 하다. 하지만 많은 돈이 오가는 엉프리뫼르만큼은 매우 냉정하여, 모든 와인들은 가격이라는 기준으로 순서가 정해진다. 엉프리뫼르 시음에서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은 밸런스와 숙성 잠재력이다. 가장 맛있기도 하지만 또한 가장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되는 와인들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 와인 컬렉터들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는, 12병 혹은 24병 단위로 구매한 와인들을 매년 한 병씩 맛보며 시간에 따른 변화를 지켜보는 일이다. 최근에는 기술의 발달로 출시하자마자 마셔도 되는 와인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고급 와인들은 어리게 마시면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어리게 마시기 위해서는 최소한 하루 전부터 준비하는 소믈리에의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다.

지금은 최고급 와인을 이야기하면 모두가 붉은색을 떠올린다. 보르도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급 와인으로 꼽히는 부르고뉴의 로마네 콩티(Romanee Conti), 미국 나파밸리의 스크리밍 이글(Screaming Eagle) 모두 붉은색이다. 하지만 100년 전에도 세계 최고의 와인이 적포도주였을까? 와인 애호가라면 한 번쯤 궁금해 할 수 있는 합리적인 호기심이다.

세계 4대 메이저 골프대회 중 하나인 브리티시 오픈의 우승자에게는 클라레 저그(Claret Jug)라고 불리는 우승 트로피가 전달된다. 1860년에 시작한 이 유서 깊은 대회는 처음에는 챔피언 벨트를 증정하였으나, 1872년부터 클라레 저그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클라레’는 영국에서 보르도 와인을 부르는 별명으로, 브리티시 오픈의 창립자들이 보르도 와인을 좋아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사실 클라레는 평범한 보르도 와인이 아니라, 지금으로 치면 로제 와인에 가까운 연한 색깔의 와인을 의미한다. 1872년은 보르도 그랑크뤼 등급이 정해진 1855년으로부터 17년이나 지난 시점으로, 그때까지도 연한 와인들을 즐긴 영국 사람들로부터 당시의 와인 소비 습관을 짐작할 수 있다.

▶18세기에 사랑받은 와인은 연한 로제 와인

12세기 중세의 유럽, 지금의 보르도가 포함된 프랑스 아키텐 지역의 상속자였던 엘레노어(Elenor) 공주는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이혼하고 헨리 2세와 결혼하게 된다. 이후 헨리 2세가 잉글랜드의 왕이 되면서 보르도 와인은 영국 시장에서 국가의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 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보르도는 지금처럼 고급 와인을 생산하는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의 보졸레 누보처럼 가볍고 쉽게 마실 수 있는 와인으로 유명했으며, 보르도 와인은 귀족들보다 런던의 일반 대중에게 사랑받았다. 보르도 와인이 고급와인으로 성장한 것은 그보다 무려 600년 가까이 지난 18세기로, 고가 와인들이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줄 것으로 생각했던 샤토 오브리옹의 아르노 드 퐁탁이나 현재의 샤토 라피트 로칠드를 소유했던 니콜라 알렉산더 세귀르 등에 의해 고가 와인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18세기에도 여전히 연한 스타일의 보르도 와인이 사랑 받았으며, 귀족들은 고급 보르도 와인에 물을 타서 마셨는데 당시에 사용된 손잡이가 달린 단지가 바로 클라레 저그이다.

지금도 보르도에는 보르도 클래레(Bordeaux Clairet)라는 와인이 생산된다. 보르도의 적포도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메를로로 만든 로제 와인으로, 그 모습이나 이름이 클라레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난 수백 년간 영국 시장에서 누린 화려한 인기와 비교할 때, 보르도 클래레는 점유율이 경작면적 기준 보르도 전체 1%에 머물 정도로 초라하다. 지난 2003년, 생테밀리옹 그랑크뤼 1등급 포도원인 샤토 피작(Figeac)에서 로제 와인을 생산한 적이 있었다. 2003년에는 극심한 더위에도 불구하고, 샤토 피작을 포함한 많은 포도원에서는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포도를 생산하였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와인 가격의 안정화를 위해 면적당 포도 수확량을 조절하고 있었던 참이었는데, 정부에 제출한 예상보다 초과하여 수확된 포도들은 정부에 아주 싼 값에 넘겨야 했다. 당시 샤토 피작에서는 포도밭의 일부를 샤토 피작이 아니라 다른 와인, 즉 낮은 등급의 로제 와인으로 신고하는 편법을 써 정부에 포도를 넘기는 걸 피할 수 있었다. 그때 만들어진 와인이 바로 샤토 피작 로제 와인이었으나 인기를 끌지 못해 그 이후에 다시 생산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20세기 들어 로제 와인의 인기가 시들해 지면서, 로제 와인 생산자들은 레드 와인으로 주력품목을 바꾸기도 했지만 일부 생산자들은 새로운 시장을 두드리며 마케팅에 꾸준한 투자를 해왔다. 2000년대 초에는 여성 소비자들을 타깃으로 한 낮은 알코올 도수의 로제 와인이 잠시 붐을 일으켰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하지만 여름휴가용 와인으로 포지셔닝한 와인 회사들의 마케팅 전략이 성공하면서 로제 와인이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로제 와인은 어떤 요리에도 잘 어울린다는 장점도 있다. 우리나라의 음식들은 매운 조미료 때문에 종종 고급 레드 와인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경향이 있으나 로제 와인하고는 잘 어울리는 편이다. 마침 무더운 여름이 다가오고 있는데, 더위와 한국음식 모두에 보르도산 로제 와인은 너무나 완벽한 동반자이다.

[이민우 와인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6호 (2019년 7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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