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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마음산책] 단오, 지금도 그날 오면 고향 간다
기사입력 2019.05.31 15: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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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보리가을’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그런데 이걸 정말 가을로 생각하면 안 된다. 보리가 익는 시절이니까 바로 봄과 여름 사이의 계절이다. 예전 어른들 말로는 보리가 익을 무렵의 날씨는 봄과 여름의 한중간이면서도 또 가을처럼 서늘한 맛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하던 우리는 그 느낌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 그건 어른들이 논밭에서 땀을 흘리고, 또 땀을 들이면서 느끼는 계절 감각 같은 것이었다.

단오는 바로 그런 때에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는 오월 단오나 유월 유두나 그날 하루를 보내는 데 별다른 구분과 의미가 없다. 그러나 강릉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지금도 단오 때가 되면 어김없이 어린 시절 고향 마을로 간다.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단오가 별다른 날이 아닐지라도 이 나이가 되도록 나에게는 단오 같은 축제의 날이 없는 것이다. 나뿐 아니라 실제 대관령 동쪽 강릉사람들에게 단오는 지금도 추석만큼 큰 명절이다. 그곳에서 자란 우리 모두 단오에 대한 그런 추억을 가지고 있다.어린 시절 단오야말로 설날과 추석보다 더 우리가 손꼽아 기다리는 날 중의 하나였다. 마당에 감꽃이 툭툭 떨어질 때면 단오가 온다. 앵두나무 끝에 붉은 열매 가득하면 단오가 온다. 종달새 높이 날던 푸른 보리밭이 어느새 황금물결로 일렁일 때, 그 밭둑가에 지천으로 산딸기가 익고 뽕나무 오디 열매가 검붉게 익을 때, 우리가 기다리던 단오가 온다.



우리 할아버지는 참으로 많은 과실나무를 집 주변에 심으셨다. 감나무, 자두나무, 복숭아나무, 우리 집 마당과 울밖엔 정말 없는 나무가 없었다. 어릴 때 우리는 달력을 보고 단오를 짐작한 것이 아니라 마당가의 과실나무를 보고 단오를 짐작했다.

예부터 단오를 우리나라의 4대 명절이라고 했다. 보름·한식·단오·추석, 그렇게 네 명절을 크게 쇠었다. 지금은 한 장군 축제를 겸한 경산의 ‘자인 단오’와 영광굴비로 유명한 ‘법성포 단오’, 그리고 우리나라 단오제의 대명사와도 같은 ‘강릉 단오’만 남아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강릉단오제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 중의 하나로 선정되었다. 그때 함께 신청 접수된 ‘중국의 단오’를 누르고, 또 우리나라에서는 ‘종묘제례악’과 ‘판소리’에 이어 세 번째로 선정된 것이라고 한다. 중국의 단오는 화석화된 전설 속에 굴원의 이야기만 남고 말았지만, 우리의 단오는 오랜 세월 그것이 생활 속의 축제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교산 허균 선생의 글 속에도 강릉 단오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어릴 때는 이런 저런 내력을 알 턱도 없이 마을 어른도 아이들도 이 날을 온 세상의 축제처럼 기다렸다. 음력으로는 날짜 계산을 할 줄 모르는 우리로선 달력으로 단옷날을 어림하기보다는 마당가의 나무들로 ‘온 세상 축제일’을 어림했다. 산에서 산딸기가 나고, 밭둑마다 뽕나무의 오디가 익고, 담장 밖의 앵두나무들이 붉어지면 곧 단오가 오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꼭 단오 차례를 지냈다. 추석 차례상에 전날 따온 밤이며 감이며 햇과일을 올렸다면, 단옷날 아침 차례상에는 울밑에서 딴 새빨간 앵두를 올렸다. 앵두는 밤이나 감처럼 전날 따놓는 것이 아니라 차례를 지내기 전 이른 아침에 형제들이 울 밖 앵두나무에 매달려서 땄다.

한식과 추석에 송편을 빚었던 것처럼 단오에는 수리취떡을 준비했다. 수레바퀴 모양의 취떡을 만든 것이다. 거기에 들어가는 취나물은 깊은 산속에서 뜯어왔다. 그리고 앵두로 마치 젤리와 같은 앵두편도 만들고 앵두화채도 만들고, 강릉 경포호수에서 파온 창포를 삶은 물로 머리도 감았다.

어린 시절 단오는 나뿐 아니라 우리 동네 모든 아이들의 꿈이었다. 우리 동네만이 아니라 강릉 부근 모든 마을 아이들의 꿈이었다. 내게 단오는 일 년에 딱 하루, 우리가 태어난 대관령 아래의 산골마을을 벗어나 사람 많고 자동차 많은 강릉 시내를 구경할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내 기억으로 단오 때가 농촌의 1년 가운데 가장 바쁜 때가 아니었나 싶다. 부엌의 부지깽이조차 너무 바빠 누워 있을 사이가 없을 정도였다. 동네 어른들은 어떻게 하든 단오 전에 모를 다 심고 좀 더 편한 마음으로 단오 구경을 가는 것을 목표로 하루도 쉬지 않고 모내기를 했다. 다른 일은 비가 오면 쉬기라도 하지만 모내기는 비가 와도 쉬지 않았다. 등에 퍼붓는 비를 그대로 맞고, 더러는 부들 잎으로 만든 도롱이를 등에 걸치고 모내기를 했다.

그렇게 바쁜 때여도 어느 한 해 단오 명절을 허술하게 넘겼던 적이 없었다. 내 기억에 설빔과 추석빔은 슬쩍 그냥 넘어간 적은 있어도 단오빔만은 그냥 넘어간 적이 없는 것 같다.

단오 무렵 아무리 바쁘다 하여도 바깥일꾼들이 어느 하루 저녁 마을회관 같은 곳에 모여 굵은 동아줄을 틀어 그걸 마을 입구의 커다란 밤나무에 해마다 매어두었다. 아저씨들이 뛰려고 맨 그네가 아니라 마을의 아주머니들과 누나들, 그리고 우리 같은 아이들을 위해 그네를 매어둔 것이다. 어린 시절 내 마음에 한식과 추석은 조상님을 위한 명절이고 단오는 아이들을 위한 명절이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 만큼 단오는 그 자체로 축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단옷날이 되면 아버지·어머니와 함께 온 가족이 단오 구경을 갔다.
지금도 내 기억 속에 가장 아득하고 먼 길은 대관령 아래의 우리 집에서 큰길로 나와 거기에서부터 남대천 옆길을 따라 시내까지 먼지가 풀풀 나는 길을 하염없이 걷던 기억이다.

1년에 한 번 시내로 간다는 기쁨에 들떠 있으면서도 그 반듯한 신작로는 왜 끝이 보이지 않고 가물가물하기만 했는지. 지금 자동차로 달리면 금방 단오장까지 내려가는데, 그때는 그 길을 걸어 천방 둑에 도달하는 것까지만도 하염없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눈을 감으면, 내 추억 속엔 지금도 한 아이가 타박타박,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단오구경을 가고 있다.

[소설가 이순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5호 (2019년 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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