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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마음산책]추억 속의 마포 종점
기사입력 2019.01.08 10:2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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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50년대 후반 강원도 대관령의 동쪽 아래에서 태어났다. <내 추억 속의 마포 종점>이라고 제목을 붙였지만, 실제 지명으로 마포 종점에 대한 기억도 추억도 있을 수 없다. 내가 추억하는 마포 종점은 은방울 자매의 노래 <마포 종점>이다.

그 노래가 처음 나오던 해 나는 열두 살 초등학교 6학년 소년이었다. 만 나이로 열두 살이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통 세는 나이로 일곱 살에 초등학교(그때는 초등학교)에 입학해 열두 살에 6학년이 되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대관령 아래 산골 소년이었지만, 내가 태어나 자란 산골마을과는 상관없이 그해는 내게 참 인상적인 일들이 많이 있었다. 대관령 아래의 산골 중에서도 아주 오지 마을이라 어쩌다 자동차 한 대가 마을에 들어오면 전교생이 공부를 하다가도 모두 교문 밖으로 뛰어나가 자동차를 구경했다.

봄, 여름, 가을에는 자동차가 마을로 들어오지 못했다. 마을까지 자동차가 들어오려면 마을 입구에 놓인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그 다리는 리어카 한 대만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나무다리였다. 겨울이 되어 마을 안쪽 큰 산에서 벌목 산판을 하면 그 나무를 실어 나를 트럭이 다닐 수 있게 다리 아래 냇물에 산판 나무를 깔아 임시로 길을 만들었다. 겨우내 트럭들이 열심히 산판나무를 실어 나르고, 봄이 될 즈음 제일 마지막에 다리 아래 냇물에 깔았던 나무를 마저 걷어갔다. 그렇게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자동차도 들어오지 않는 산골 마을에 사는 소년에게 서울 전차의 마포 종점이라니.



아마도 가을 소풍 때였던 것 같다. 한 학년 한 반인 시골 학교 소풍은 전교생이 같은 곳으로 소풍을 갔다. 그래야 3학년 동생과 6학년 언니나 오빠의 점심을 어머니가 같이 싸 갈 수 있었다. 소풍의 재미는 뭐니 뭐니 해도 보물찾기와 노래자랑이다. 점심을 먹는 동안 선생님들이 몰래 여기저기에 보물을 숨겨놓고, 점심시간이 끝나면 바로 보물찾기를 한다. 보물찾기 시상식을 전교생 노래자랑과 동시에 진행하는데, 아이들의 노래는 별로 재미가 없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소풍을 가든 어디를 가든 학교에서 배운, 음악책에 나오는 노래만 했다. 유행가는 소풍을 따라온 어른들과 선생님만 불렀는데, 그해 가을 소풍이 내 기억에 오래 남아 있는 것도 두 곡의 노래 때문이었다. 학년 별로 아이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는 틈틈이 학부형도 선생님도 함께 노래를 불렀다. 학교 사환으로 있던 열아홉 살 경자 누나가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을 부르고 나서 자기 다음 노래를 부를 사람으로 그해 우리 학교에 전근을 온, 총각은 아니지만 총각처럼 젊은 5학년 선생님을 지목했다. 그러자 아이들도 좋아하고, 소풍을 따라온 어른들도 좋아했다. 그때 5학년 선생님이 부른 노래가 바로 그해 봄에 발표된 다음 하루 한두 번은 꼭 라디오에 흘러나오던 <마포 종점>이었다. 밤 깊은 마포 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강 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

첫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 밤

하나둘씩 불을 끄고 깊어 가는 마포 종점

여의도 비행장에 불빛만 쓸쓸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생각하면 무엇하나

궂은비 나리는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그 노래를 부르기 전 5학년 선생님은 서울에 가면 마포에 종점을 둔 전차가 그해까지만 운행을 해 앞으로 우리가 서울에 가도 그 전차를 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게 된다고 했다. 그게 대관령 아래 산골에 사는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정말 아무 상관도 없는데 나는 그 말이 왠지 섭섭하고 아쉬웠다. 내가 자라 어른이 되어 서울에 간다 해도 그걸 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그때로부터 17년이나 흐른 다음 나는 마포에 첫 직장을 얻었다. 당시 본사가 마포에 있던 신용보증기금이었다. 그곳에 면접시험을 보러가면서도 <마포 종점>을 떠올렸다. 늘 수줍은 얼굴의 경자 누나는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까, 소풍날 <마포 종점>을 부르던 그 선생님은 어느 학교에 가 있을까를 생각했다.

마포 공덕동 부근에는 돼지갈비를 파는 집들이 참 많았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둔 무렵이라 대폿술을 파는 가게는 없었지만, ‘대포’라는 이름이 들어간 술집과 음식점도 부근에 참 많았다. 그런 집들은 어김없이 갈매기살을 팔았고, 퇴근 때면 부근의 일터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술잔을 기울였다. 돼지갈비와 갈매기살이 워낙 유명하여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도 그곳으로 많은 문인들을 불렀다. 노래방에 가면 꼭 <마포 종점>을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어른 한 분이 내게 전차가 다니던 시절 마포 전찻길과 마포 종점에 대해 알려주었다. 마포 종점 자리가 지금 불교방송이 있는 건물 쪽이라고 했다. 그 분은 학창시절 전차를 타고 다녔으며, 강 건너 영등포의 아련한 불빛과 늦은 밤 여의도 비행장을 밝히는 불빛을 보고 자란 사람이었다. 당인리 발전소도 그때 처음 가보았다. 마포 회사에 들어갔던 때로부터도 30년이 지났다.

<마포 종점>에도 나오는 우리나라 최초의 화력발전소인 당인리발전소(서울화력발전소)가 문화창작발전소로 거듭난다고 한다. 지하에는 여전히 화력발전 설비를 갖추고, 지상은 자연공원에 종합문화센터로 조성한다고 했다. 지금은 일흔쯤 나이를 먹었을 경자 누나도 어딘가에서 손자들 재롱을 보며 잘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소풍날 <마포 종점>을 불렀던 젊은 선생님도 은퇴하여 어딘가에서 잘 살아가고 계실 것이다. 열두 살이었던 나도 어느 새 귀밑머리가 조금씩 하얘져 가며 이렇게 잘 살아가고 있다.


소설가 이순원

1957년 강릉에서 태어났다.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한무숙문학상, 허균문학상, 남촌문학상, 녹색문학상, 동리문학상을 수상했다. <말을 찾아서>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아들과 함께 걷는 길> <19세> <은비령> <삿포로의 여인> 등을 썼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00호 (2019년 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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