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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마음산책] 이 가을 공책 속 혼잣말
기사입력 2018.10.18 15: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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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 아무 때나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둘 공책 한 권을 놓아두고 있다. 일정한 형식도 없이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을 거기에 적는다. 누가 전화를 걸어오면 통화 중에 나눈 인상적인 말이거나, 또 읽던 책 한 구절을 적어두기도 한다.

어느 날 지나간 메모를 읽어보면 그게 나의 기록인데도 참 새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누구에겐가 “너도 한 번 해봐” 하고 권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정말 별다른 걸 적지 않았는데도 그렇다. 글을 쓰는 한 후배에게 얘기하니까 그걸 어떻게 기록하는지 좀 보여 달라고 한다. 정말 별다른 기록이 아니다. 그냥 그때그때 생각난 일과 마주치는 세상 풍경에 대해 안부를 묻듯 적은 글이다. 조금 소개를 하면 이런 식이다.



고향의 한 후배가 산길을 걸으면서 길가에 떨어진 알밤을 주워 찍은 사진을 보내 왔다. 날씨로도, 나무와 과일로도 그렇게 가을이 깊어 간다. 어제 아침에도 창밖에 새가 날아와 울었는데, 오늘도 아침에 또 새소리가 들린다. 지금 우는 새는 가끔 쌍을 지어서 오는 지빠귀라는 새다. 공동단지 정원에 서 있는 저 상수리나무가 새를 부르는 나무 같다. 내 서재 창가의 목련나무까지는 오지 않는다. 여기엔 흔하고 흔한 뱁새가 날아와 한참 동안 저희들끼리 떠들다가 날아간다. 이놈이 바로 붉은머리오목눈이다.

그래서 저 새 얘기를 우화처럼 한번 써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이 녀석이 알에서 깨어난 것은 봄날 초저녁이다. 그때 이 아이의 어미 새가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서쪽 하늘에 ‘육분의자리’라는 아주 작은 별자리가 눈에 들어와 이 아이에게 ‘육분의’라고 이름지어 주면 어떨까. 그런데, 새들도 밤하늘의 별을 쳐다볼까? 문득 그게 궁금하다.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사람의 욕망은 내버려 두면 한없이 자라난다. ‘한없는 희망은 차라리 희망이 없느니만 못하다. 욕망에 한계를 둔다는 것은 목표를 분명히 가졌다는 뜻이다.’ 이것은 톨스토이의 말인데, 아마도 허욕에 대한 경계가 아닐까 싶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면 쉽게 알아채는데 내게 적용되는 것이면 얼른 알아채기 어렵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알면서도 또 가장 모르는 것이다. 내 글쓰기에도 허욕을 부려서는 안 될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쌀쌀하다. 감기 걸리지 말고, 건강하자.



어제 강릉을 오가는 기차 안에서 작품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작품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그 끝에 톨스토이의 또 다른 말 하나가 어떤 경구처럼 떠오른다. ‘지혜가 깊을수록 자기 생각을 나타내는 말이 더욱 단순해진다. 말은 사상의 표현이다.’ 그래서 나이든 어른들의 말수가 줄어드는 것일까. 나는 나이가 적은 것도 아닌데 여전히 생각이 많다. 작품에 대한 생각은 끝이 없다. 오늘은 톨스토이의 저 말을 마음속에 새긴다. 지금 쓰는 소설에서 가장 경계하고 또 지켜야 할 말이다. 나는 한참 멀었다.



어제 저녁부터 비가 내렸다. 비 때문인가. 아직 빗물이 떨어지는 상수리나무와 목련나무에 새가 오지 않았다. 오늘은 ‘인생보다 더 어려운 예술은 없다’는 세네카의 말로 하루를 시작한다. 예술이나 학문은 가는 곳마다 스승이 있지만 인생의 스승은 그만큼 만나기 어렵다는 뜻일 것이다. 먼저 쓴 소설의 앞부분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엎고 또 엎고, 다듬는다.

중국의 시선 이백이 상의산(象宜山)에 들어가 공부할 때 공부에 싫증이 나서 스승에게 말도 하지 않고 산에서 내려와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한 노파가 냇가에서 바위에 도끼를 갈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이백이 노파에게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자 노파는 “바늘을 만들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이백이 다시 상의산으로 돌아갔다.

그의 시가 수만 번을 갈고 간 도끼 안에서 나온 것임을 예전에는 젊은 사람들 공부하라고 지어낸 얘기인 줄로만 알았다. 이제 나이가 드니 그게 실제 일이었을 거라는 걸 안다. 어떤 글이든 글을 써놓고 나서 문장과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서양에도 그런 점에서 본받을 사람이 한 명 있다. ‘만일 내게 나무를 베기 위해 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우선 나는 도끼를 가는 데 45분을 쓸 것이다.’ 링컨의 말이다.



기온이 떨어지니 감기 조심하라고 핸드폰이 알려준다. 나는 전기도 안 들어오는 대관령 아래 벽촌에서 태어났는데, 전기가 들어온 것도 대학 1학년 때였고, 전화는 군대에서 제대한 다음 들어왔다. 그때는 장차 핸드폰 같은 물건이 나올 거라는 걸 세상사람 가운데 아무도 몰랐던 이런 물건이 내 삶을 돕고 상관하고 간섭하고 위로하고 놀아주는 이런 세상을 살고 있다. 눈 뜨자 제일 먼저 들여다보는 것도 이 물건이고.



‘창밖에 작은 새소리만 들리고 지빠귀는 날아오지 않는다’라고 썼는데, ‘내가 안 올 리가 없잖아요’ 하듯 지빠귀가 날아왔다. 가을이면 생각나 한 번은 꼭 꺼내 읽는 헤세의 아름다운 시가 있다.



여자친구에게 보내는 엽서

오늘은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바람은 푸가로 흐느껴 웁니다.

초원에는 아직 꽃이 남아 있지만

벌써 온통 서리로 뒤덮여 있습니다.



낙엽 한 잎 창문 앞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눈을 감으며 나의 작은 사슴이여,

먼 안개의 거리를 걷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걸 스무 살 언저리서부터 계속 읽어 왔으니 아마도 40년 넘게, 40번은 더 읽었을 것이다. 이 시를 이 가을에 내 글을 읽는 독자 분들과 함께 읽고 싶다. 때로는 이런 감성을 지녀 무얼 하나 싶기도 하지만, 그러나 지금이 바로 이런 시 속의 가을이지 않은가.

[소설가 이순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97호 (2018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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