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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마음산책] 내 추억 속의 여름 풍경
기사입력 2018.06.29 09:4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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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여름보다 요즘 여름이 더 더운 것 같다. 그때는 에어컨은커녕 선풍기조차 없었어도 지금보다 시원했다. 그 시절 시원하게 났던 여름을 한번 추억해 보자.

감나무 아래나 느티나무 아래에 멍석을 깔고 누워 부채를 부치며 새소리와 매미소리를 듣는 것도 시원할 것이다. 그곳도 원두막만큼 시원하지는 않다. 예전에 방학이 되면 동생과 나는 마당가에 원두막부터 지었다. 그러나 원두막은 과수원이나 참외밭에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걸 ‘상서리’라고 불렀다. 아마 시골에서 자란 나이 든 어른들은 이 상서리를 매어 보았거나 혹은 그 위에 올라가 놀아 보았을 것이다.

상서리를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집 마당가에 있는 큰 감나무 아래에 그 감나무를 한 축으로 굵은 나무 세 개를 더 세우고 키 높이보다 훨씬 높은 곳에 허공 다락을 만든다. 다락은 보릿짚 위에 멍석을 깐 다음, 다시 매끈한 왕골자리를 한 잎 더 올려서 깐다. 감나무 잎이 충분히 해를 가려주지만, 저녁때 모기가 달려들지 못하도록 방 모양의 모기장을 칠 수 있게 헐렁 지붕도 만든다.

동생과 나는 식구들과 따로 밥도 그곳에서 먹을 때가 많았다. 어머니가 밥상을 가져오면 우리가 덜렁 위로 들어올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귀찮기도 하셨을 텐데 어머니는 “내가 사람이 아니라 신선을 낳은 죄로 마당 심부름이 많다”며 찐 감자나 찐 옥수수 같은 간식거리와 마당가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꽤(자두)와 포도를 수시로 따 날라 주셨다. 그러니 그때는 여름이 더운지 몰랐다.

요즘 시장에 자두는 나도, 자두의 원조가 되는 재래종 ‘꽤’는 나지 않는다. 어쩌다 보게 되어도 내가 어릴 때 부르던 이름 ‘꽤’로 불리지 않고 ‘콩자두’라고 불린다. 크기는 작은 방울토마토만 한데, 맛도 자두보다 아주 시다. 원두막에 앉아 신 자두를 먹으면 오싹한 맛에 더위가 저만치 달아난다.

봇도랑은 냇물에 보를 막아 그 봇물이 논으로 흘러 들어가고 또 흘러나올 수 있게 만든 작은 도랑이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해도 그 봇도랑에 얽힌 시골 아이들의 추억까지는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어린 시절 여름방학이면 동생과 나는 거의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봇도랑을 뒤졌다. 내가 체를 들고 “고기 잡으러 가자” 말하면 동생은 얼른 주전자를 들고 따라 나선다. 우리만 그러는 게 아니라, 하루에 동네 아이들 열 팀은 그 봇도랑을 뒤진다. 그런데도 그 작은 봇도랑에 미꾸라지와 쌀미꾸리가 마를 날이 없었다.

지금은 봇도랑을 뒤질 아이도 없지만, 봇도랑에 노는 고기도 없다. 농약을 쓰기 시작한 다음 거의 씨가 말랐다. 수백 마리 수천 마리가 밤하늘에 작은 불빛을 이을락 끊을락 날아다니던 반딧불도 비슷한 시기에 자취를 감추었다. 시골집 마당에 형제가 모이면 동생은 지금도 그때의 봇도랑을 얘기한다. 자기도 주전자 대신 체를 들고 고기를 잡고 싶었는데, 형이 한 번도 체를 주지 않았다고 지금도 술만 마시면 응석을 부리듯 투덜거린다. 그러다 초복이 되면 마을 단위로 ‘질’이라는 것을 했다. 바쁜 여름 농사일 끝내고 한숨 돌릴 때이다. 다른 동네에서는 ‘호미씻이’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마을 앞 냇가에 커다란 화덕을 만들고, 어느 해엔 거기에 소머리를 삶기도 하고 또 어느 해엔 동네의 큰 개 한 마리를 잡기도 했다. 모두들 든든하게 점심을 먹고 나면 부락의 가장 나이든 좌장어른께서 동네 젊은이들을 불러 조용조용 타이른다.

“저기 길 옆에 너희 집 논 말이다. 이대로만 가면 큰 수확을 하겠더라. 그런데 다른 동네 사람이 보면 ‘이 동네는 논에 피를 저렇게 세워놓아도 그걸 나무랄 어른도 없나’ 그럴까 봐 내가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

또 지난겨울 노름을 했던 아저씨를 불러서는 “이제부터는 손끝에 힘쓸 거 있으면 그 힘 논밭에 다 쓰고, 다시는 화투장 같은 거 쥐지 마라”하고 타이르고, 울 너머로 늘 큰 소리를 내는 집에 대해서는 “이제는 애들도 커 가는데 그러면 되겠느냐”고 타일렀다.

지금은 보려야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었다. 어쩌다 냇가에 와서 텐트를 치거나 낚시를 하는 사람이 있어도 동네 사람들이 아니라 모두 외지 사람들이다. 마을에는 모두 노인들만 남았다. 그래도 고향에 가서 그 분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분들이 논밭에서 일하던 시절의 일들이 떠오른다. 여름날 저녁풍경도 잊을 수가 없다. 시골의 저녁밥은 늘 늦다. 어른들이 논밭에서 늦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저물어 밭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저녁을 지을 동안 우리는 마당에 멍석을 깔고 저녁 먹을 자리를 마련한다. 멍석 옆에 모깃불도 피운다. 주위는 점점 어두워지고 밤하늘의 별은 그대로 밥상에 쏟아져 내릴 듯 초롱초롱하다. 그 시절엔 은하수의 자잘한 가루까지도 헤아릴 만큼 눈이 좋았다. 저녁을 다 먹으면 형제들이 멍석에 누워 별을 바라보며 학교에서 배운 별자리를 찾아보기도 하고, 움직이는 별처럼 아주 천천히 밤하늘을 가로질러 떠가는 인공위성을 찾아내기도 한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그때 우리가 붙인 별자리의 이름들이다. 지금의 골프채 같은 ‘곰배자리’도 있고, ‘새총자리’도 있고, ‘주전자자리’도 있다. 어떤 별자리는 너무 억지로 그림을 만들어 붙인 것이라 형제간에 말이 되느니 안 되느니 작은 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그럴 때 판정을 해준 사람이 아버지였다.

그때는 아버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바르고 옳게 느껴졌는데 돌아보니 나와 형이 다투면 내 편을 들어주었고, 나와 동생이 다투면 동생 편을 들어주었다. 다시 갈 수 없는 날의 추억은 늘 이렇게 내 마음 안에 아름답다. 이것이 어디 나 하나만의 추억일까. 내가 살았던 대관령 동쪽마을뿐 아니라 전국의 모든 시골마을의 여름풍경과 그곳에서 자란 사람들의 추억이 이렇지 않을까. 그때로부터 참 많이 걸어왔다.
함께 걸어온 그리운 형제들과 그리운 친구들. 그리고 그리운 추억들아, 이제 다시 올 수 없다 하여도 영원히 우리 마음 안에 고향처럼 머물길…. 그 추억으로 우리를 늘 마음의 고향으로 인도하길….

[소설가 이순원-1957년 강릉에서 태어났다.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한무숙문학상, 허균문학상, 남촌문학상, 녹색문학상, 동리문학상을 수상했다. <말을 찾아서>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아들과 함께 걷는 길> <19세> <은비령> <삿포로의 여인> 등을 썼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94호 (2018년 07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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