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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진훈 칼럼] 핸디캡과 영양제
기사입력 2018.06.29 09:3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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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핸디캡(Handicap)이라는 용어는 경마에서 나왔다. 실력 차가 너무 나는 말들끼리 동일한 룰로 달리면 늘 승자와 패자가 똑같을 가능성이 크다. 경기의 박진감을 높이기 위해 잘 달리는 말에게 짐을 좀 더 지우자는 게 핸디캡이었다. 옛 영국귀족들은 이것도 복불복이라 여겼던 모양이다. 모자 안에 짐의 무게를 적은 쪽지를 집어넣고, 임의로 집은 숫자만큼 말에 짐을 실었다. 핸디캡이라는 말도 ‘모자 안에 손을 집어넣는다(Hand in cap)’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요즘 경마에선 핸디캡이 훨씬 체계적으로 바뀌었다. 말의 전적, 나이, 조교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 총 부담중량을 정한다. 기수의 체중에다 안장, 모포, 보호장구 무게 등을 모두 합한 게 부담중량이다. 적게는 50㎏, 많게는 65㎏ 안팎이니 차이가 적지 않다. 예전엔 납을 달기도 했지만, 요즘은 안장 밑에 까는 고무 라텍스 소재 패드로 무게를 조절한다. 한국경마의 전설로 불리는 차돌, 포경선 같은 명마(名馬)들은 전성기 때 비정상적으로 68㎏까지 중량을 안고 달렸다. 과도한 핸디캡은 명마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박진감을 높이기는커녕 오히려 하향평준화로 경주의 질을 떨어뜨린 것이다.

실제 이런 대안을 사용해 본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꾸로 상향평준화 룰을 적용했으면 어땠을까. 핸디캡 상한선을 60㎏ 정도로 줄이되, 우승말의 상금 일부를 하위권 말 영양제 구입비로 나눠줬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얘기다. 더 좋은 조련사나 기수를 붙여주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하위권 말들까지 잘 달리면 당연히 경마장 관중수나 수입도 따라서 늘 것이다. 만년 꼴찌 말이 근력과 실력을 붙여서 해외리그까지 진출한다면 그야말로 드라마 소재감이다.

단적으로 얘기하면 핸디캡은 정치논리, 영양제는 경제논리라 할 수 있다. 진보·보수라는 진영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원래 정치는 약자의 편이다. 시장경쟁에서 패한 사람의 피난처(Shelter) 구실을 하는 곳이 바로 정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이고, 체급이 다르니 출발점부터 달리해야 한다는 게 바로 정치논리다.

한정된 자원의 배분 등 효율성 면에서는 당연히 정치논리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정치가 경제보다 열등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냉엄한 경쟁사회에서 솔직히 승자는 소수이고, 패자가 다수일 가능성이 크다. 이들에게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줘야 한다는 정치인들의 웅변은 더 가슴에 뜨겁게 와닿는다. 유난히 삼세판을 좋아하는 우리민족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문제는 도덕성과 대중의 박수에 취한 정치가 울타리를 뛰어넘어 애써 가꾼 경제의 영토를 마구 헤집어 할퀼 때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이나 근로시간 주 52시간 규제, 대기업 옥죄기 등이 대표적이다. 엄밀히 말해 이런 정책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다. 약자보호라는 명분은 그럴 듯하지만 막상 시장에선 정반대의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게 단적인 증거다. 최저임금 인상은 외환위기 이후 최악 수준의 대량 실업사태를 초래했다.

7월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에 의무화되는 주 52시간 근로제는 밤샘영업이나 근무를 밥 먹듯 하는 유통매장, 버스회사, 건설현장 등에 상당한 타격을 줄 것으로 염려된다. 초과근무 금지로 퇴직금까지 줄어들지 모른다며 벌써 사표를 내는 버스 운전기사들도 꽤 있다고 한다. 한 언론인은 “저녁 있는 삶은 좋지만 저녁 밥값은 어디서 구하나”라고 한탄했다.

6·13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싹쓸이 승리를 거뒀으니 정치는 이제 한 템포 쉬어 갈 때도 됐다. 마침 2020년 4월 총선거까지 22개월 동안은 사실상 정치 비수기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올 하반기엔 10년 주기의 글로벌 경제위기 사이클이 찾아올지 모른다고 경고하는 목소리가 높다.
미·중 무역전쟁에다 미국 금리인상에 따른 외국인 자금유출 등 불안한 요소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경제에만 올인해도 위기를 무사히 넘길지 아슬아슬한 지경이다. 무엇보다 핸디캡으로 국민들 배 아픈 문제를 풀어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빵이나 영양제 없이 배고픈 문제를 해소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설진훈 LUXMEN 편집인·편집장]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94호 (2018년 07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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