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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마음산책] 가족과 함께 걸으면 대화는 저절로
기사입력 2018.05.04 10: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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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도 그렇고 5월도 그렇고 참 걷기 좋은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4월과 5월의 차이는 푸름의 차이 같습니다. 4월에는 개나리와 진달래, 목련이며 벚나무 등 온갖 나무들이 잎을 내기 전에 꽃부터 먼저 피웁니다. 잎은 늘 꽃치레 다음에 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나무들도 많죠. 잎을 낸 다음 꽃을 피우는 나무로 이팝나무가 있습니다. 꽃도 세상을 환하게 하지만 잎은 더욱 세상을 환하게 합니다. 4월은 꽃으로 환하고 5월은 잎으로 환합니다.

이제 세상은 더욱 푸르러지겠지요. 말 그대로 푸른 봄입니다. 저는 아주 오래전, 푸른 봄에 어린 아들과 함께 대관령을 걸어서 넘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 아이와 함께 걸으며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대관령 아래에서 마치 먼 산을 바라보듯 대관령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제게 대관령은 어른들이나 이제 어른들이 되어가는 형들이 가족과 떠나 멀리 대처로 돈을 벌러 가거나, 군대를 가거나, 독립을 하여 외부 세계로 나가는 길의 어떤 상징처럼 여겨졌습니다. 멀리 떠났던 가족이 명절이 되어, 또 방학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도 그 길이었습니다. 또 어머니가 멀리 객지에 나가 공부를 하거나 군에 간 아들을 기다리며 바라보는 길도 바로 그 길이었습니다.

그런 대관령 길을 큰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대관령 정상에서부터 그 아래까지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걸어 내려가 보았습니다. 다들 가족 간에 대화가 중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고, 아이들과 부모 사이에도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합니다. 대화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실천하기는 참 쉽지 않습니다. 우선은 한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가 바쁜 때문이고, 자식들도 자라면서 점점 집 밖으로만 돌다 보니 서로 이야기할 시간이 없어진 것입니다. 대화는커녕 어떤 때는 가족끼리 서로 얼굴 마주보기 쉽지 않은 때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부부간에도 돈 얘기 말고는 도통 나누는 얘기가 없습니다.

예전에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그러셨습니다. 우리들이 학교에 가져가야 하는 돈 얘기를 할 때도 그랬습니다. 돈 얘기를 아버지에게 바로 하지 않고 보다 얘기하기 편한 어머니에게 합니다. 그러면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집안에 무슨 일로 돈이 얼마 필요하다고 얘기합니다. 아버지는 알았다고 딱 한마디합니다. 그리고 그날까지 아버지가 돈을 마련해 어머니에게 주고, 어머니가 우리에게 줍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돈 얘기와 친척들 얘기 말고, 세상 얘기는 거의 나누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한 세상 사는 데 지장이 없었다기보다 바깥세상 얘기를 나눌 식견도 부족했고, 또 당장 사는 일만으로도 버거워 바깥세상 얘기를 나눌 여력이 없었던 것인지 모릅니다. 그래도 어머니, 아버지는 밭에 같이 나가 곡식을 심으면서도 또 밭이랑에 나란히 앉아 밭을 매면서도 그때그때 필요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해 이야기하지 못한 부분은 없습니다. 매월 자식들이 물어가는 돈 이야기가 긴요하니 아무래도 그 이야기가 중요했던 것이겠지요. 가족 간의 대화는 오히려 어머니 아버지보다 더 많이 배운 우리 세대에 와서 더 부족해진 것 같습니다. 같은 집, 같은 공간에 사는 사람인데 “얼굴을 봐야 대화를 하지” 하는 말이 나오는 것도 서로 바빠서이겠지요. 대화가 부족하다면 그 부족한 대화를 집안에서, 식탁과 거실에서만 마치 테니스 공 던지고 받듯 툭툭 한마디, 다시 한마디 받고 하는 식으로 대화하지 말고 여러분도 한번 길 위에서 대화를 나누어 보십시오.

나는 지금도 가족은 서로에게 믿음과 힘을 주며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족 간의 정이라는 것도 억지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가족과 함께 떠난 길 위에서 나누는 대화만큼 정다운 대화는 어디 있을까요. 식탁에서 나눌 수 있는 대화가 있고, 길 위에서 나눌 수 있는 대화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나중에 자라서도 오래 아이가 기억하고 가슴에 담는 것은 어쩌다 한번 그렇게 마음먹고 떠난 길 위에서의 대화들이지요. 같은 일상적인 대화라도 식탁에서 나누는 대화와 길 위에서 나누는 대화는 우선 그 깊이가 다르지 않을까요.

가족이 함께 있는 시간이 부족해서 서먹하고 소외감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있어도 가족 간에 대화가 없을 때 서로 그런 소외감을 느끼는 것이지요. 때로는 세상살이가 힘든데 살다보면 사람이 왜 좌절할 때가 없겠는지요. 세상이 어렵고 힘들수록 우리는 누군가의 격려와 응원이 필요합니다.

초등학교 운동회 달리기 시합에서도 그렇습니다. 힘껏 달릴 때에도 응원이 필요하지만 달리다 넘어져 쓰러졌을 때, 그래서 온통 울고 싶은 마음뿐일 때 아이는 그것을 바라보는 엄마, 아빠의 얼굴에 따라 자신의 다음 행동을 결정합니다. 쓰러진 아이를 보고 엄마, 아빠가 실수를 책망하듯 함께 낙담하면 아이는 그대로 주저앉아 울어 버리고 맙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승선의 승부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너는 네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너를 지켜보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다시 일어나 달려야 한다고, “누구야 힘내!” 하고 엄마, 아빠가 불끈 주먹을 쥐어 보이며 응원하면 아이는 지금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자신의 모습까지도 자랑스러워하며 결승점을 향해 달려 나갑니다.

아이들뿐이 아닙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한 지붕 아래 가족 간에 서로 불어넣어주는 용기와 격려의 대화야말로 가족들 저마다 마음 안에 서로를 비추어 따뜻하게 온기를 나누게 하는 사랑의 빛이 아닐까요. 그동안 하지 않아 낯설다면 지금 시작해 보시길 바랍니다. 일부러라도 한번 오래 길을 걸으며 가족과 이야기를 나눠 보세요. 어제와는 또 다른 정이 생길 것입니다. 가족은 오랜 시간의 길을 함께 걸으며 서로 아는 이야기도 다시 한 번 나누는 사람들이랍니다. 저는 이번 5월 좀 특별하게 온 가족이 다 강릉 경포해변과 경포호숫가의 정자들을 걸어서 둘러볼 생각입니다. 그러자면 미리 공부를 좀 해야 합니다.
어디든 길을 걸으면 대화는 저절로 시작되니까요.

소설가 이순원 1957년 강릉에서 태어났다.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한무숙문학상, 허균문학상, 남촌문학상, 녹색문학상, 동리문학상을 수상했다. <말을 찾아서>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아들과 함께 걷는 길> <19세> <은비령> <삿포로의 여인> 등을 썼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92호 (2018년 0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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