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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명화극장] 어쩌면 당신은 스스로를 파괴하며 살고 있을지도
기사입력 2018.02.28 1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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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가 그렇지만 못사는 사람들 얘기를 보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빈자(貧者)의 철학’ 따위는 가증스러운 수사학일 뿐이다. 못살면, 돈이 없으면, 자칫 여자는 매춘을 하게 된다. 길거리에 나앉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그리고 아이들은 거리에서 뛰놀게 된다. 말이 노는 것이지 그건 방치하는 일이 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6살 꼬마 무니(브루클린 프린스)처럼. 그리고 이 아이의 엄마 할리(브리아 비네이트)처럼.

이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공개되기 전 사람들에게 소개된 한 두 줄의 영화 줄거리는 이런 식이었다. ‘플로리다 디즈니 월드 건너편 매직 캐슬에서 살아가는 귀여운 6살 꼬마 무니와 그의 친구들의 신나는 무지개 프로젝트’ 운운이다. 그런데 이건 그야말로 ‘낚시 글’이다. 영화는 전혀 신나지도, 무지갯빛을 하고 있지도, 무엇보다 전혀 귀엽지도 않기 때문이다. 대신 영화는 6살 아이들의 눈을 통해 그려지는 ‘무지막지하게 폭력적인’ 자본주의의 음영을 드러내는 데 주력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궁극으로 달려가는 지점은 과연 어디인가. 어쩌면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스스로를 파괴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되묻는다. 그 질문의 방식이 꽤나 뼈아프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각자 자신들이 지금껏 살아왔던 방식, 그 원천에 대해 근본의 회의감을 갖게 된다. 계급과 계층이 이렇게나 무차별적으로 구별지어지는 사회를 위해 우리 모두가 지금까지 그렇게나 애쓰고 살아 왔나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어쩌면 인물보다 공간이 주인공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주인공은 할리와 무니, 그리고 이 막무가내의 어린 모녀를 둘러싸고 이런 저런 일상의 갈등을 빚으며 살아가는 다중(多衆)들이다. 모텔 ‘매직 캐슬’의 매니저 바비(윌렘 대포)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궁상(窮狀)의 이웃들이 나온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건 결국 특정한 주인공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 주연은 매직 캐슬이란 공간 그 자체이다.

매직 캐슬은, 이름과 달리, 한마디로 싸구려 콘도형 모텔이다. 큰 길 건너에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상징인 디즈니 월드와 그에 준하는 타운 하우스들이 즐비하지만 여기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디즈니 월드 언저리에서 기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영세민들의 유일한 터전인 셈이다. 매직 캐슬에는 우리의 허름한 여관들이 그렇듯이 집을 장만할 수 없는, 장기 투숙자들이 모여 살아간다.

‘장기’로나마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엉성하지만, 임시직이긴 해도, 직업이 있는 사람들이다. 할리 같은 여자는 거기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녀는 일일 투숙자다. 그녀는 하루 단위 혹은 일주일 단위로 방값을 내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가 않다. 할리는 방값을 구하기 위해 고급 호텔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어린 무니를 앞세워 향수나 목욕 세제를 ‘야매’로 팔아 가며 살아간다. 온 몸에 새겨진 타투(Tatoo)가 보여주듯 그녀는 아직 젊은 나이의 싱글맘이지만 지금까지의 삶이 그간 진실로 녹록지 않았음을, 스스로 여러 굴곡을 자진하고 자초해서 지나왔음을 보여 준다. 할리는 방값과 빵(피자)값과 담뱃값과 대마초값을 위해 하루하루를 때우며 살아간다. 그녀의 삶은 한 마디로 ‘악다구니’의 연속이다.

구겨진 삶을 살아가는 어른들은 아이들을 의도적으로 평등하게 대하는 법이다. 자신들도 헉헉대고 있는 마당에 아이들에게 아이들다운 삶을 보장해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없는 자’들의 아이들은 일찍부터 내면이 성숙해진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쓰고 욕을 배우고 침을 뱉고 그렇게 어른들과 일상을 합쳐 나간다. 6살 무니도 안다. 아이들은 늘, 알 건 이미 다 안다. 무엇보다 자신의 엄마 할리의 삶이 ‘모범적’이지도 ‘정상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안다. 할리는 자신의 한 칸짜리 방에 남자를 끌어 들여 몸을 팔 때면 무니를 욕탕으로 보내 혼자서 놀게 한다. 할리는 무니에게 말한다. “자 이제 목욕할 시간이야.”

영화는 자꾸 무니가 혼자 욕탕에 앉아 장난감을 가지고 물놀이하는 장면을 비교적 클로즈업해서 보여 준다. 욕실 문 바로 바깥에서 엄마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영화조차 그 시야와 소음을 차단시키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는 짐짓 모르는 척, 순진하게 혼잣말을 하며 욕탕 안에서 인형들을 데리고 논다. 살아가면서 가장 슬픈 일은 아이가 세상의 비극을 자신의 그 조그만 가슴 안 구석으로 조금씩 밀어 넣고 침묵할 때이다.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무니의 반복적인 목욕 장면을 통해 보는 사람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과연 너희들이, 지식인이라며 잘난 척하며 살아가는 당신들이, 상처투성이인 저 아이의 심연을 알기나 하냐고 되묻는다. 알 수나 있겠냐고 질타한다. 무엇보다 그 생채기를 어떻게 치료해 주고 또 진심으로 망각하게 해 줄 것인가를 다그친다.



▶어쩌면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못사는 것은 어쩌면 응당 못사는 사람들의 잘못일 수 있다. 흔히들 그렇게 생각한다. 사회가, 지독한 경쟁을 통해서 상위(上位)에 오른 사람들이,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냐고들 할 법하다. 할리 같은 여자는 실로 자격이 없어 보이긴 한다. 특히 저렇게 살려면 애를 낳거나 키우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질이 하고 싶어질 만큼 그녀의 인생은 막장이다. 할리는 직업소개소에서 늘 이렇게 떠든다. “나에게 일다운 일을 좀 줘 봐요. 썅.” 그렇게 욕을 하는 그녀에게 사회복지사는 말한다. “우리가 당신을 도울 수 있게 제발 노력을 해 봐요. 부탁이에요.” 할리는 늘 그렇게 세상과 평행선을 달린다. 그녀 탓에 어린 딸 무니도 세상 안쪽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아이는 자칫 위탁 가정에 맡겨질 판이다. 아무리 못난 엄마라도 엄마는 엄마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엄마와 헤어진다는 것은 아이에게 세상이 그만큼 진입 장벽을 높이 세운다는 얘기다. 아이를 위해서라는 것은, 자본주의의 간교한 거짓말일 뿐이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시스템을 지키려는 것일 뿐, 눈곱만큼도 아이를 위할 생각이 없다. 정녕 아이를 위해서라면, 그러니까 이 영화의 무니 같은 아이를 위해서라면 엄마의 생존권을 강구하도록 고민하는 것이 올바른 정치학이다. 가난한 엄마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고 그것이 아이에게 ‘낙수(落水)’되도록 해야 하는 법이다.

영화를 보다가 이쯤의 생각에 이르게 되면 도대체 할리와 무니 모녀가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흔히 얘기하듯 현 사회를 구성하는 ‘자본의 방식’이 잘못된 것인지, 우리가 잘못된 것인지, 누구의 잘못인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어쩌면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영화는 속삭인다.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를 만든 감독 션 베이커의 메시지이다.

영화는 종종 우회로를 통해 직설의 메시지를 던진다. 도널드 트럼프라는 역대 최대의 변종 대통령과 권력 집단을 탄생시킨 지금의 시대에 <플로리다 프로젝트>야말로 가장 기이한 정치 영화처럼 느껴진다고 하면 지나치게 컨텍추얼(Contextual)한 해석일까. 궁극의 오역(誤譯)이 될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 영화를 향해 전미비평가협회 등에서 최우수 남우조연상(윌렘 대포) 등 22관왕을 수여한 것은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이루어낸 빛나는 성과의 조그마한 덤일 뿐이다. 제목이 상징하듯, 세상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세울 때가 됐다. 진정 그럴 때가 됐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90호 (2018년 0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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