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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마음산책 | 2018년 새 달력을 바라보며
기사입력 2018.01.05 17: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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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방마다 달력을 바꾸어 걸었습니다. 달력을 바꾸어 거는 일은 이미 지난 12월 중순쯤에 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인지 새해 달력인데도 어떤 달력의 첫 장은 새해 1월이 아니라 지난해 12월 날짜들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새 달력을 미리 걸어도 불편함이 없게 하는 것이지요.

많은 회사들이 12월 초가 되면 달력을 나누어 줍니다. 은행과 보험회사들도 12월 초에 새 달력을 나누어 줍니다. 그래서 새해 달력이지만 첫 장에 지난해 12월 달력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달력을 받을 때마다, 또 새 달력을 걸 때마다 아, 이렇게 또 한 해가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달력을 바꾸어 거는 일로 송구영신을 하는 거지요.

경기가 좋을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연말에 가장 인심 좋게 나눠 쓰는 물건이 바로 달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기억으로 볼 때 예전 IMF 때에도 달력 인심이 그다지 나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언제나 받아오는 달력이 집안의 방 숫자보다 많습니다. 새로 받은 달력을 거실에서부터 안방, 아이들의 방, 부엌에도 한 장 걸어두고, 그리고 내 책상 위와 아내의 책상, 화장대 위에도 작은 책상 달력 하나를 놓아둡니다.

새 달력을 받아 걸 때마다 나는 대관령 아래 산골마을에서 자랐던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일부러 생각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 시절이 떠오릅니다. 한 해가 오고 갈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강릉 시내의 이런 저런 가게에서 달력을 얻어 옵니다. 산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은행에 예금을 하고, 보험을 들고 할 처지가 아니니까 강릉 시내의 옷가게, 고무신 가게, 우리는 연탄을 때지 않지만 누군가 얻어서 주는 연탄공장 달력, 주로 이런 달력을 가져옵니다.

여러 종류의 달력을 얻어 와도 어른들이 좋아하는 달력과 어린 우리가 좋아하는 달력이 다릅니다. 우리는 멋진 그림이거나 풍경이 인쇄되어 있는 달력이 좋지요. 어른들은 멋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달력보다는 네모 반듯반듯한 칸에 큰 글씨가 쓰여 있는 ‘상회달력’을 좋아합니다. 금은방 달력과 연탄공장 달력이 주로 그렇습니다. 어릴 때는 어른들은 멋을 잘 몰라 그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달력에는 그날그날의 음력 날짜와 일진까지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안의 제삿날과 대소사를 미리 적어 놓습니다.

또 매일매일은 아니지만 집안의 어떤 중요한 일들을 달력의 숫자 아래 빈칸에 적습니다. 친척의 결혼식 날짜를 적어 놓기도 하고, 자식 중 누가 학교로 공납금을 가져간 날이면 그날 빈칸에 ‘누구 공납금 얼마’ ‘누구 교복 값 얼마’ ‘누구 책값 얼마’ 하고 돈을 쓴 용처와 금액을 적어 놓기도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우리 집은 축사에 여러 마리의 소를 먹여 키웠는데 아버지는 외양간에 소가 들어온 날과 나간 날, 또 암소의 인공수정일, 송아지 출산일까지 적어 놓았습니다. 어른들한테는 글씨가 크고 여백이 많은 ‘상회달력’이 일종의 메모장이며 가계부 역할까지 했던 것이지요. 틈틈이 돈을 물고 간 여러 자식들과 또 돈을 벌어들인 가축과 농산물의 들고남이 거기에 다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게 40~50년 전 아버지와 어머니의 달력 사용법이었는데, 그게 지금 저의 달력 사용법이 되었습니다.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한 달 한 달 넘겨쓰는 책상 다이어리를 그렇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글을 쓰는 것이 직업이다 보니까, 그 달력엔 청탁받은 원고를 넘겨야 하는 날, 원고 매수, 원고의 주제, 담당자 전화번호, 그리고 지방 강연일, 미리 잡은 약속날짜 같은 것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습니다.

벌써 그런 달력을 20년째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습니다. 보통 달력은 한 해 쓰면 버리기 마련인데, 마치 그 달력이야말로 제가 지나온 날들에 대한 기록이자 내가 쓴 원고들의 물증 같아 쉽게 버릴 수가 없어 어느 해부터인가 한 권 한 권 보관해 오기 시작한 것이 스무 권이 넘었습니다.

물론 외출할 때에도 손에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 속에도 원고 일정들이 다 들어 있지만, 그건 그 전화기를 사용할 때뿐이지 10년, 20년 보관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달력에 적어놓는 아날로그 방식의 기록물만 하지 못합니다. 지난 시절의 달력이 스무 권쯤 되니 마치 내 개인의 시간 박물관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서재 제일 아랫자리에 보관하고 있는 달력 뭉치 중에서 아무렇게나 뽑아든 2004년 12월 18일 토요일에는 서울 신촌 형제갈비에서 중학교 동창 10여 명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군요. 그날 만난 열네 명의 친구들 이름까지 적혀 있습니다. 달력 속에 써놓지 않았다면 다시 떠올리지 못할 일이겠지요.

올해 새로 바꾸어 건 달력을 바라보는 마음도 새롭습니다. 방의 달력을 바꾸며, 또 책상 위의 달력을 바꾸며 새로운 날들에 대한 새로운 마음을 다지게 됩니다. 그건 나이가 어렸을 때에도 그렇고 나이가 들어서도 그렇습니다. 그냥 하루하루를 보내다가도 막상 달력을 바꾸어 걸면 지난 한 해 내 삶은 어떠했는지 저절로 돌아보게 됩니다. 여러분의 지난 한 해는 어떠했는지요? 그리고 바꾸어 건 달력을 보며 새해에 대해 마음속으로 어떤 계획을 세우게 되지요. 지나간 해에는 무얼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새해에는 이런저런 일들을 꼭 해야겠다거나 이루어야겠다고 구체적이지는 않더라도 막연하나마 어떤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이제까지 보관하고 있는 달력이 제법 되는 저는 달력을 바꿀 때마다 지나온 여러 해의 달력을 한꺼번에 펼쳐놓고 봅니다. 보다 성실했던 해도 있고, 그렇지 못한 해도 있고, 또 어떤 일로 많이 아쉬워했던 해도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지난해의 달력을 버리지 마시고 책꽂이에 차곡차곡 보관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 달력 위에 적힌 글자 하나하나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당신의 추억이 될 것입니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어느 해 자신의 한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당신 삶의 현장이 바로 그 달력 속에 있습니다.

올해에도 멋있는 달력을 거십시오. 아니, 많은 추억으로 당신 삶 안에 더욱 빛을 발하는 멋진 메모장으로 새로 건 달력을 채워 나가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삶이 한결 의미 있어질 것입니다.

※편집자주-2018년 1월호부터 이순원 작가의 ‘마음산책’을 새롭게 연재합니다. 1988년 문학사상에 단편소설 <낮달>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순원 작가는 다양한 소재와 주제, 탄탄한 문장으로 삶과 내면의 문제를 풀어가는 대한민국의 대표 작가입니다.

[소설가 이순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88호 (2018년 0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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