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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진훈 칼럼] 中 홀대외교, 문제는 따로 있다
기사입력 2017.12.27 11: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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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고장난 나라이니 내 말대로만 하기를 바라오.”

20대 중반, 약관(弱冠)에 점령군 우두머리로 올라선 새파란 청나라 외교관이 고종에게 훈계조의 상소를 올린다. 우리에겐 원세개(袁世凱)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위안스카이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진압하고 조선을 다시 청나라로 예속시킨 1등공신이니 안하무인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얼마나 가소롭게 봤으면 고종의 인사도 제대로 안 받아주고 사실상 대리통치자 노릇까지 했다. 그는 상소에서 조선을 ‘재목은 다 썩고 돛도 떨어져 나가 버린 배’라고 비유하며 10가지 제안을 한다. 말이 제안이지 대신임명, 관청기능 재편, 재정 개편 등을 모두 자기 뜻대로 해달라는 하명(下命)에 가까웠다.

지난 12월 11일 밤, 중국 국영 CCTV는 문재인 대통령의 국빈방문을 앞두고 22분짜리 대담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한 야당 중진은 “젊은 CCTV앵커 수이쥔이(水均益)가 우리 대통령을 대하는 태도가 마치 구한말 원세개를 연상케 했다”고 개탄했다. 앵커는 황제의 칙사라도 되는 양 사드 관련 질문을 연거푸 세 차례나 퍼부으며 문 대통령을 몰아붙였다. 문 대통령은 “시간을 두고 해결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하다”며 정중한 뉘앙스로 답했다. 하지만 앵커는 “CCTV를 보는 수억 명의 중국 시청자들에게 한국정부가 어떤 방향으로 노력하겠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달라”며 닦달하는 투로 공세를 이어갔다. 이미 우리정부가 중국의 양해를 구하듯 ▲사드 추가배치를 않는다 ▲미국 주도의 마사일방어체계(MD)에 가입하지 않는다 ▲한·미·일 협력을 군사동맹으로 확산하지 않는다는 소위 ‘사드 3불(三不)’ 원칙을 표명했는데도 말이다.

내용 못지않지 형식도 무례했다. 앵커는 인터뷰 전 청와대 본관 앞에서 “사드 문제에 문 대통령이 어떻게 답변할지 들어가 볼까요”라며 점령군처럼 입장했다. 정상회담 하듯 똑같이 생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 대통령과 대담하는 그의 모습에서 예의를 찾아보기란 어려웠다. 나름 청와대는 ‘일개 타국의 앵커에게도 격 없이 대하는 대통령의 소탈함’을 보여 주려 했을지 모른다. 보수정권과는 다른 소위 탈(脫) 권위주의 행보일 수 있다. 사드 보복에 신음하는 우리 기업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이런 뉴스쇼 정도는 백 번 양보해도 된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를 놓고 보니 방중 이틀 전 방송된 CCTV 인터뷰는 참사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양국 간 조율실패로 공동 기자회견문을 못한 ‘내실부족’은 어쩌면 급조된 정상회담의 예견된 결과였다. 하지만 의전 등 형식은 역대 대통령 외국방문 중 최악이었다는 평이 나온다. 실제 국빈을 대하는 중국 측 태도는 ‘홀대’를 넘어 ‘결례’에 가까웠다.

물론 보수정권 때도 중국의 홀대외교가 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취임 후 첫 중국을 방문했던 2008년 5월, 당시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한 당일 친강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노골적으로 한·미 동맹을 비판하는 결례를 범했다. “한·미 군사동맹은 역사적 산물이다. 냉전시기의 군사동맹으로는 역내 안보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라고. 신자유주의 동맹을 추구하며 중국보다 친미외교에 무게중심을 둔 MB정권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참여정부 이래 가장 적극적으로 친중외교 노선을 표방하는 진보정권인 데도 이런 홀대를 받았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일각에선 청와대 내 386 운동권 출신 등은 궁극적으로 ‘한·미·일 경제동맹’보다 ‘남·북·중 사회주의 동맹’에 더 관심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까지 보낸다. 적어도 북핵문제에 관한 한 이번 방중 때 우리가 중국 측에 추가 제재에 대한 얘기를 한마디도 꺼내지 않을 정도로 중국의 눈치를 많이 본 게 사실이다.
이런 와중에 하필 난징대학살 80주년을 맞은 날 중국을 국빈 방문한 것은 일본 측을, 북핵은 놔둔 채 ‘한반도 내 전쟁 절대불가’만 강조한 것은 미국 측을 각각 자극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한 언론은 방중결산에서 ‘한국은 미·일의 신뢰를 잃었고, 중국은 한국인의 마음을 잃었다’는 타이틀을 뽑았다. 이번 홀대외교는 어쩌면 문재인 정부의 ‘중국·북한 짝사랑 외교’가 낳은 필연적 사생아일지 모른다.

[설진훈 LUXMEN 편집인·편집장]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88호 (2018년 0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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