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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의 유념유상] 상추객을 아시나요?
기사입력 2017.11.02 10: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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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춘객이라는 말은 봄꽃 나들이가 한창인 계절에 신문이나 방송의 헤드라인을 종종 장식하곤 한다. 단풍의 계절인 11월은 어떤가. 상추객이라는 말이 역시 신문이나 방송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만한데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 말은 없나? 있다. 한 포털사이트의 사전에 분명히 나와 있다.

「상추객[爽秋客]:(명사) 가을의 경치를 즐기러 나온 사람」

그런데 왜 상춘객만큼 쓰지 않는 걸까. 상추, 삼겹살 싸 먹는 채소부터 떠오르게 하는 말이라서? 상추객, 실은 찾기가 쉽지 않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말이니까. 포털사이트의 사전이라고 해서 다 나오는 것도 아니다. 이젠 없어진 말일까. 그래서 안 쓰는 말일까? 상추객이라는 단어를 사전에 실은 포털사이트는 친절하게도 최근 그 말이 실린 기사까지 보여준다.

「추석을 앞두고 나들이를 나온 상추객들이 화창한 날씨를 만끽하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대전일보 2008년 8월)」

「이곳에는 가을의 전령사인 코스모스가 만개, 많은 상추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경인일보 2011년 9월)」

사전을 찾으며 새로이 안 사실이 하나 있다. 상춘객의 상은 ‘賞’이라 쓰고 상추객의 상은 ‘爽’이라고 쓴다는 점. 같은 글자일 줄 알았는데 다르니 궁금할 수밖에. 賞은 ‘감상을 한다’고 할 때의 상이다. 즐긴다는 뜻도 있다. 그러니 상춘은 봄을 감상하거나 즐긴다는 뜻이다. 爽은 ‘시원하다’는 의미다. 마음이나 정신이 맑다, 혹은 높고 밝다는 뜻도 있다. 그러니 상추는 시원한 가을이라는 뜻이다.

한자를 알게 되니 그 말이 조선시대에도 쓰였고 일본에서도 쓴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다. 쓰인 사례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이 ‘상추객’이라는 말에 집착하는 걸까. 가을이고 11월 단풍철이라서? 물론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렇다고 거의 안 쓰는 ‘상추객’이라는 희소 단어까지 떠올릴까. 역시 개인적인 사연이 있는 것이다. 가을, 단풍 하면 두 누님이 떠오른다.

나는 2남 4녀 중 막내였고 시골 초등학생이었다. 첫째, 둘째 누님은 출가하고 형님은 입대하여 집에는 나와 10대 후반의 두 누님만 있었다. 어느 가을날 두 누님이 경쟁하듯 단풍을 배경으로 한껏 폼을 잡았다. 사진기도 없던 시절인데 마치 카메라 앞에 선 것처럼 이리저리 포즈를 취했다. 그 모양이 뚜렷하고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우리 초가집은 사시나무와 벚나무로 둘러싸여 있어서 어느 곳보다 먼저 단풍이 들었다. 단풍도 새빨갛거나 샛노랗지 않고 연록이 은은하게 섞여서 말 그대로 시원한 느낌이 드는 가을날이었다. 그 풍광의 한복판에서 몸을 틀며 포즈를 잡는 두 누님이 희한했던지, 마침 그곳을 지나던 마을의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허허, 빛 좋은 날 어린 두 상추객이라!”

상추객이라는 낯선 말과 누나들의 어딘가 좀 이상한 몸짓들 때문에 그날의 기억이 뚜렷해졌는지도 모른다. 나중에서야 누님들의 묘한 포즈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았다. 달력이었다. 달력사진. 안방 아랫목 벽에 걸린 달력에는 달마다 변화하는 멋진 풍경 속에서 세 여성이 번갈아 우아한 포즈를 반복하고 있었다. 남정임, 문희, 윤정희. 누님들은 그들을 흉내 내고 있던 거였다. 사진 흉내. 카메라도 없이.

가을 단풍 아래서만 사진 흉내를 냈던 것은 아니었다. 봄꽃 앞에서도 사진 흉내를 냈고 옷을 입을 때도 누님들은 사진 흉내를 냈다. 머리를 빗을 때도 길을 걸을 때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도, 보이진 않았지만 누님들 앞에는 스냅 카메라나 무비 카메라가 있었다. 누님들은 기꺼이 그걸 의식하는 듯했다. 심지어는 속이 상해서 울 때까지도. 멋을 안다거나 철이 든다는 건 언제라도 누군가의 사진기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사진기가 흔해져 1가구 1카메라가 되더니 요즘은 1인 1카메라고 게다가 그것을 하루 24시간 소지하며 거의 무한정으로 촬영할 수 있다. 근사한 식당에서는 식사 전에 기도보다 먼저 촬영을 한다. 카메라가 없던 시절의 누님들도 사진 속에서 살았는데 개인 카메라뿐 아니라 몰카, CCTV, 블랙박스, 위성에 노출되고 더구나 달력 사진과는 차원이 다른 화소의 TV, 인터넷, 유튜브, SNS로 뒤덮인 세상에선 오죽할까. 카메라가 너무 많아 오히려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시절이 되었다. 없는 카메라를 상상으로 끌어다 세웠던 누님들은 카메라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카메라를 의식할 때의 나와 의식하지 않을 때의 자연스러운 나는 달랐다. 지금은 카메라가 너무 많아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게 됨으로써, 카메라를 의식할 때의 나와 의식하지 않을 때의 자연스러운 내가 다르지 않다. 카메라를 의식하는 것이 생활화된 나머지 더는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은 채 하는 연기가 몸에 배어 버린 나를 자연스러운 나라고 여기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점점 남들처럼 큰 차를 갖고 넓은 아파트를 가지려 하는 것도 그래서 원래의 나고, 소문난 맛집과 소문난 단풍 관광지를 찾아 한쪽으로 쏠려 다니는 것도 원래의 자연스러운 내 모습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명품을 향한 열광도 정치적 이슈에 대한 찬반론도 전적으로 내 고유의 취향과 의견이라고. 그것이 나의 꿈, 나의 성취, 나의 행복이라고. 이쯤 되면 카메라나 TV 등의 매체가 나를 길들이거나 속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체가 그것들이 되는 것이다. 그것들과 주객 관계로 나뉘지 않은, 하나의 확장형 신체.

상추객이라는 말이 어째서 잊힌 것일까. 먹는 상추 같아서, 혹은 어려운 한자 때문에? 요즘은 상추객이라는 말 대신 단풍객이라는 말을 쓴다.
단풍객. 그러면 단풍만이 아닌 시원한 가을바람이나 푸른 가을 하늘을 만끽하러 나선 사람들은 뭐라 부를까. 그들도 뭉뚱그려 단풍객이라 할까.

먹는 것조차 귀찮으면 몇 알의 대체알약을 생각하게 되고, 말하는 것에 게으른 사람은 200개쯤의 단어로 세상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싶어 할 것이다. 상추객처럼 말이란 쓰면 살고 안 쓰면 잊히다 죽어 간다. 말 뿐일까. 사진 속 남의 꿈과 성취와 행복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는 사이에 자신도 잊히다 죽어 갈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다시 부지런히 자신을 찾지 않는다면.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86호 (2017년 1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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