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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의 유념유상] 7월의 풀죽내
기사입력 2017.07.13 15:50:37 | 최종수정 2017.07.21 11:4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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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죽내라는 것은 풀죽의 냄새를 말한다. 물론 풀죽은 풀로 쑨 죽이다. 그러니까 풀로 쑨 죽에서 나는 냄새가 풀죽내인 것이다.

“풀죽내 중에서도 7월의 풀죽내가 가장 고약했어.” 이것은 나의 맏누님의 회고다. “너는 풀죽을 몰라. 안 먹고 자랐으니까.” 이것은 둘째 누님의 말이다. 전쟁이 끝난 뒤 태어난 데다 나는 아들이라서 부모님이 나에게 풀죽을 안 먹였다는 것이다. 첫째, 둘째 누님은 지금도 7월이면 넌더리 나던 풀죽을 떠올린다.

오래된 이야기다. 하지만 누님들의 넌더리는 아직도 생생하다. 해방 전에도 그랬지만 전쟁을 겪으면서는 먹는 일도 전쟁이었다고 했다. 겨울에는 잘 말려 갈무리해 두었던 나물을 물에 불려 죽을 쑤었기 때문에 그나마 냄새가 덜했다. 문제는 여름이었는데, 금방 뜯어온 풋것에다가 한 줌도 못 되는 쌀을 넣고 끓였으니 날내가 오죽했을까.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난 것은 7월 27일의 일이었다. 종전이 아니라 휴전이었다. 어쨌든 전쟁이 멈추었으니 넌더리 나는 풀죽도 멈추었을까. 그럴 리 없었다. 먹을 것은 여전히 없었다. 그래서 휴전을 반기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 가족은 휴전이 반갑지 않았다. 반기지 않았다고 했다. 한반도의 허리가 완전히 막혀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외삼촌인, 어머니의 동생이 돌아오지 못했던 것이다. 홀어머니와 젊은 아내와 세 살 된 아들이 있으니 머잖아 고향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던 기대가 휴전협정과 함께 물거품이 되었다.

외삼촌은 도피성 월북을 시도했다. 배를 부리던 선장이었는데 인민군이 남하하면서 외삼촌의 배를 징발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석 달이 채 못 되어 인천상륙작전이 이루어지고 외삼촌은 인민군의 물자를 운송해 주었다는 죄목으로 쫓기기 시작했다.

후퇴하는 인민군에 섞여 월북했으려니 했다. 그러나 홀어머니와 처자식이 고향에 남아 있었던 만큼, 전세의 추이를 살펴 조심스레 고향으로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그런 믿음이 휴전협정으로 깨지고 만 것. 휴전 뒤 일 년이 지났으나 소식은커녕 오히려 외숙모가 병을 이기지 못하여 7월의 끄트머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외가에 남은 것은 외할머니와 당시 네 살이었던 외종형. 가산을 몰수당한 채 움막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풀죽으로 연명하던 우리만도 못했다.

길 아랫마을 지척인데도 어머니는 친정을 보살필 수 없었다. 아버지의 눈치 때문이었다. 인색하고 몰인정한 아버지였으나 너나없이 먹을 것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딱히 우리 아버지만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었을까. 큰 누님을 시켜 외가에 풀죽을 전했다. 풀죽 끓일 때 물 한 사발 더 넣으면 묽을지언정 죽 한 그릇이 더 나왔다. 어머니는 그것을 아버지 몰래 외가로 보냈다.

마침 마을의 유일한 샘이 외가 아래쪽에 있었는데 어머니는 어린 누님에게 물 길어 오라 시키면서 빈 물 항아리 속에다 풀죽 한 그릇을 넣었던 것이다. “우리 딸 착하지? 외할머니께 꼭 갖다 드려라.”이건 어머니가 물동이를 누님의 머리에 이어주며 당부했다는 말이었다. “7월의 풀죽내가 아무리 고약해도 배가 고픈 걸 어떡하니? 갖다 드렸다고 하고 내가 먹어 치울 수도 있었거든.” 이건 큰 누님의 말이었다. 어머니가 자꾸 착하다고 타이르는 바람에 착하지도 않으면서 착한 척하느라, 그리고 배고픔의 유혹을 꾹꾹 참고 외가에 풀죽을 전하느라 정말 죽을 맛이었다고 큰누님은 회고했다. 아버지한테 들키면 어떡하나 다리가 후들거려 여러 번 물동이를 머리에서 떨어뜨릴 뻔했다고.

그때 네 살이었던 외종형은 평생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한 채 지금껏 살아왔다. 나의 어머니가 살아 있을 적에, 그러니까 외삼촌도 충분히 살아있을 가능성이 높았을 때는 외종형도 적십자사를 통해 열심히 아버지의 생사 여부를 확인했다. 생사 여부가 아니라 존재 여부라 해야 맞겠지만 하여튼 외종형은 아직도 북에 있을지도 모를 아버지 가족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오래고도 오랜 기다림이었다. 오죽하면 외종형과 나의 대머리를 볼 때마다 가족들이 한 마디씩 할까. 칠석날 털 빠진 까마귀 머리 같다고. 7월이란 우리 가족에게 이산을 확정한 달이고 외숙모의 제사가 있는 달이며 그리하여 7월 칠석이 예사롭지 않은 달이다.

칠석이면 견우와 직녀도 오작교에서 만나지 않던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헤어져 서로를 그리워하던 별자리조차도 한 해에 한 번은 만난다는데 은하수도 아닌 같은 땅덩어리 안에서 두 발 달린 인간이 만날 수 없다니.

7월 칠석에는 세상의 모든 까치와 까마귀들이 하늘로 날아올라 견우와 직녀가 만날 수 있도록 머리를 모아 오작교를 놓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날 이후 까치와 까마귀의 머리에서는 깃털이 빠져버린다는데, 하늘나라 외숙부모의 상봉에 이바지하느라 외종형과 내가 대머리가 된 거라고 가족들은 쓸쓸히 웃었다.

7월이면 나의 누님들은 풀죽내를 떠올리며 넌더리를 치지만, 이 땅에 사는 누군들 그런 회한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픈 가족사이기 전에 이미 아픈 민족사가 아니던가. 그리고 여전히 진행 중인 사태가 아니던가. 식민지배도 안 받고 동족 간 전쟁도 안 치르고 분단도 안 되었다면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양질의 국가 혹은 국민 에너지를 아름다운 나라를 만드는 일에 투자할 수 있었을까. 생각할수록 억울한 맘이 든다. 가혹한 제국주의의 피침도 전쟁도 분단도 겪지 않았다면 우리 마음과 기질 속에는 얼마나 또 평화로운 심성들이 자랐을 것인가.

그런데 지금, 아직, 여전히, 또 핵무기를 개발하고 미사일을 쏘고 사드가 들어오고 중국과 미국이 대립하고 안보를 놓고 우리 사회 안에서 분열하며 갈등이 등등해지고 있다. 누님들의 7월의 풀죽내를 어찌할 것인가. 언제가 되어야 더는 넌더리를 안 내고 그 옛날 아스라한 풀죽내의 향수로써 맘속에 고이 간직하게 될 것인가.

소설가 구효서 1957년 강화에서 태어나 1987년 신춘문예에 단편 <마디>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작으로 장편소설 <타락>, <동주>, <랩소디 인 베를린>, <나가사키 파파>, <비밀의 문>, <라디오 라디오>, 소설집 <별명의 달인>, <저녁이 아름다운 집>, <시계가 걸렸던 자리>, <아침 깜짝 물결무늬 풍뎅이>, <새벽별이 이마에 닿을 때>, 산문집 <인생은 깊어간다>, <인생은 지나간다>가 있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지난 1월 중편소설 <풍경소리>로 제41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최근 소설집 <아닌 계절>을 출간했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82호 (2017년 07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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