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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의 유념유상] 축구의 계절
기사입력 2017.06.05 09: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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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를 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은 언제일까. 여름과 겨울은 좀 그렇고, 봄과 가을이 좋을 텐데 그중 가장 적합한 달이 언제일까. 그라운드를 달리다 보면 덥고 땀이 나니까 4월이나 10월이 좋지 않을까. 관중들이 응원하기에도 그즈음이 더없이 좋은 날씨일 테니까.

그러나 축구를 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은 6월이다. 물론 6월은 조금 덥다. 게다가 지구가 점점 더워지니 예전의 6월에 비해 요즘의 6월은 더 덥게 느껴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로선 4월이나 10월이 가장 좋겠지만 기후만을 따져 축구하는 날을 정하는 것은 규모가 작은 독립 지역리그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적어도 FIFA(국제축구연맹) 주관의 국제적 축구경기는 6월일 수밖에 없는 행정적 이유가 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독일의 분데스리가, 스페인의 프리메라리가, 이탈리아의 세리에A, 프랑스의 리그1 등 축구의 고장인 유럽의 빅 리그들이 5월 말에 일정을 마친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유럽의 축구 클럽들은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유능한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리그를 마쳐야 비로소 선수들은 자국으로 돌아가 국가대표에 합류하여 월드컵 등의 국가대항 축구경기에 참여하게 된다. 세계적인 축구경기 이벤트가 6월에 몰릴 수밖에 없는 이유인데, 그리하여 축구하기 가장 좋은 달을 6월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기 전이고 퇴근 시각에 맞추어 개최되는 경기가 많기 때문에 적어도 경기를 하는 선수들과 개최국의 관중에게는 6월이라 해도 계절적으로는 나쁠 것이 거의 없다. 그래서 우리도 축구를 생각할 때 6월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데, 특히 축구를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6월이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신록이 바람에 살살 나부끼는 계절이 되면 기억하거나 뭘 따져볼 겨를도 없이 살갗이 먼저 찌르르 수축하며 6월이 왔음을 알린다. 머리보다 몸이 앞서서 떠올리는 6월. 주체할 수 없었던 전율과 흥분을 피부가 기억하는 것이다.

왜 안 그럴까.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가 6월의 일이었지 않은가. 과연, 설마, 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이전까지만 하더라고 대한민국 국가대표는 월드컵 경기에 나가서 단 한 경기도 이기지 못했던 팀이었다. 그런데 예선 첫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고 우승후보 중 하나였던 포르투갈을 이기며 16강에 올랐다. 그것도 무패로. 무패로 16강에 진출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기적이었는데 믿을 수 없는 기적의 행진은 계속되었다. 축구팬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했던 이탈리아의 아주리 군단과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차례로 꺾는, 어쩌면 월드컵 사상 다시없을 이변이 연속되었다. 그때 전국의 아파트 단지를 지진처럼 흔들던 함성과 6월의 싱그러운 가로수를 누비며 외치던 ‘대~한민국’의 길거리 응원을 어찌 피부라고 잊을 수 있을까.

흥분과 놀람의 기억으로 치자면 사실 그보다 19년 앞선 축구경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때 나는 스물다섯 청춘의 열정 팬이었기 때문에 지구 반대편의 멕시코에서 열리는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를 뜬눈으로 지새우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붉은 악마라는 별명을 얻으며 멕시코와 우루과이 팀을 차례로 꺾고 4강전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김종부가 선제골을 넣었을 때, 전국의 다방과 버스 터미널은 완전 뒤집어졌었다. 전 국민이 하나 되어 희열로 소름 끼치던 그해의 계절도 이즈음이었으니, 19년 뒤 재연된 6월의 함성이 어찌 피부에 각인되지 않았겠는가.

2002년 6월이 지난 뒤 우리는 박지성과 이영표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 오랫동안 열광했고 나 또한 설기현과 이청용, 기성용과 손흥민, 분데스리가의 구자철과 지동원, 박주호와 김진수를 주말 밤마다 응원했다. 요즘도 컴퓨터 화면에 두 세 개의 경기화면을 동시에 띄워 놓고 실시간으로 보는 편이지만 종종 어떤 곤혹스러움이 비집고 들어와 예전처럼 경기에 몰입하지 못한다. 축구를 좋아하는 나에게 질문이 생긴 것이다.

첫째, 축구를 좋아한다면서 나는 왜 국가대표 간 경기인 A매치나 유럽리그만 보고 국내 K리그에는 관심이 없을까? 둘째, 축구를 좋아한다면서 나는 왜 한국선수가 포함되지 않은 외국 클럽 팀의 경기는 자주 보지 않으려는 걸까? 이 두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미 오래 전에 나와 있었다.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축구를 좋아한다. 그리고 나는 한국 대표 팀의 경기를 좋아하거나 한국선수가 소속한 외국 클럽 팀의 경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새로 묻고 답해 보았다. 과연 나는 축구를 좋아하는 걸까, 한국을 좋아하는 걸까? 나는 축구를 좋아하며 한국을 좋아한다. 정말 축구를 좋아한다면 K리그나 한국인 선수가 소속되지 않은 다른 외국 클럽의 경기도 좋아해야 하고, 또 정말 한국을 좋아한다면 평소 한국사회에 대한 지나친 비판을 좀 자제해야 한다고 보는데 어째서 안 그러는가? 모르겠다. 내 대답은 거기서 막혔다. 모르겠다.

어쩌면 축구를 핑계로 한국을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한국을 핑계로 축구를 사랑하는 것일지도. 내게는 그게 그건가? 그 어느 쪽도 그것 자체로만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으니까. 어딘가 비겁해 보이기도 한다. 나는 축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외국과의 경기에서만큼은 한국 축구를 열렬히 응원한다, 혹은 나는 한국을 무턱대고 사랑하지는 않지만 외국과의 대결에서는 한국을 무조건 응원한다. 이건가? 그럼 나는 한국을 사랑하는 것이다. 멋쩍으니까 축구를 핑계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멋쩍을까. 자기 나라라고 무작정 좋아하기만 하는 건 맹목 국수주의자가 되는 거라서? 그렇게 되기 싫은데 어쩌다 보니 속내는 자꾸 그쪽으로 이끌리는 게 쑥스러운가? 쑥스럽다는 건가 아니면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건가. 이것도 모르겠다. 맹목의 국수주의자도 싫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자가 되기도 싫은데 축구를 좋아하는 이유와 방식은 영락없이 그쪽인 듯하니 참 무슨 조화인지 모를 수밖에. 월드컵 축구대회가 국가 대항의 방식을 택한 것은 흥행과 수익을 위해 국가주의를 이용한 처사라고도 볼 수 있다. 올림픽 대회도 마찬가지. FIFA나 IOC로서는 당연히 그럴 만하고 국가로서도 나쁠 게 없겠다. 스포츠 경기를 통해 애국심이 엄청나게 치솟을 테니.

그러나 민족국가의 국기를 소매에 붙이고 나라를 위해 뛰는 선수들에게 정치적 발언이나 행위는 금지되어 있다. 박종우 선수의 ‘독도는 우리 땅’ 사건을 우리는 기억한다. 클럽 대항전이라면 모를까 국가 대항전에서 국기를 달고 치열하게 싸웠던 선수가 일본을 이긴 뒤 했던 ‘독도는 우리 땅’ 세리머니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그런데 하지 말란다.

국가 대항전인데 국가의식 같은 건 갖지 말라 그건가? 갖더라도 드러내지 말라? 그러면 경기력도 안 드러날 텐데. 그래도 외교문제로 번지고 전쟁으로도 치달을 수도 있으니까 하면 안 된다? 실제로 1969년에는 축구 때문에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던 적도 있었다. 6월이 축구의 계절이라 설렌다는 말을 하려다가 이야기가 좀 길어지고 심각해졌다.
붉은 악마라는 별명을 얻었던 국제 청소년 축구대회(FIFA U-20)가 올해는 5월 20일부터 6월 11일까지 한국에서 열린다. 나는 또 열광할 것이다.

열광하면서도 생각하겠지. 축구만 보면 거의 반사적으로 나라 편들기를 하는 이유는 뭘까. 국가교육 때문일까 FIFA 때문일까. 북한 응원단도 자기 나라를 일방적으로 무섭게 응원하던데 다들 자기 나라를 엄청 좋아해서일까. 하지만 이런 성가시고 곤혹스런 생각이 경기 관람을 크게 방해할 것 같지는 않다. 무섭게도, 생각 이전에 몸이 먼저 마구 달아오르지 않던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81호 (2017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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