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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의 인문학산책 ① 히틀러의 광기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비롯됐다?
기사입력 2019.02.01 15:26:07 | 최종수정 2019.05.08 17:2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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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오스트리아 국경 작은 마을 브라우나우에서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나 열세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불우한 시절을 보낸 아이, 국립실업학교를 때려치우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예민한 소년, 미술대학에서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고 그림엽서를 팔면서 생계를 유지한 청년, 독신자 합숙소에 살면서 바그너와 독서에 심취했고 병역기피 혐의로 체포된 적이 있는 남자.

아돌프 히틀러(1889~1945)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갔던 걸까. 인류 최대 비극이라는 2차대전을 일으키고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의 정신세계는 늘 이야깃거리가 된다. 도대체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히틀러가 반유대주의 사상을 뼛속 깊이 새기고 실천했는지 사람들은 알고 싶어 한다. 한 사람의 광기라고 치부하기에 그가 저지른 행위는 너무나 엄청났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각인된 어떤 콤플렉스가 그의 광기를 키웠다는 주장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장의 사진을 기억해야 한다.

1904년 오스트리아 린츠에 있었던 국립실업학교인 레알슐레 재학생들이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이다. 레알슐레는 히틀러가 1903년부터 1년여를 다녔던 학교다. 이 오래된 흑백사진을 유심히 살펴보면 놀라운 얼굴 하나가 등장한다. 다름 아닌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이다. 천재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앳된 얼굴이 사진 속에 있는 것이다. 이 사진 한 장을 들고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희대의 전쟁범죄자 히틀러와 20세기 최고의 천재라는 비트겐슈타인은 동갑내기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렇다면 둘의 동창관계가 히틀러의 광기와 무슨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다. 몇몇 호사가들은 히틀러의 비뚤어진 반유대주의의 기원에는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천재철학자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열등감이 있다고 말한다. 무슨 열등감이었을까.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상황을 하나 하나 복원해보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우선 비트겐슈타인 가문에 대해 알아야 한다. 당시 비트겐슈타인 가문은 카네기나 로스차일드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유명한 세계적인 철강 재벌이었다. 유대인 가문이긴 했지만 비트겐슈타인 집안의 부와 권세는 대단했다. 비트겐슈타인 집안의 재력은 당시 빈 예술계 전체를 먹여 살리다시피 할 정도였다. 비트겐슈타인 집안의 후원 없이 빈의 예술은 존재하기 힘들었다.

브람스, 슈만, 구스타프 말러, 브루노 발터, 쇤베르크 등이 비트겐슈타인 집에 식객으로 드나들었다. 비트겐슈타인 집안은 구스타프 클림트가 창설한 예술단체인 분리파의 절대적인 후원자였다. 이 인연으로 클림트는 비트겐슈타인 누나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거액의 예술 후원금을 받은 사람 명단에는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있었다.

생각해보라. 비트겐슈타인 집안 식구들이 성찬을 즐기는 동안 옆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슈만의 모습을….

게다가 비트겐슈타인은 명석하고 잘생기기까지 했다.

이런 금수저 비트겐슈타인의 호사를 어깨너머로 보고 들으며 종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갈던 소년이 있었다. 바로 아돌프 히틀러다.

히틀러 역시 음악과 미술, 문학을 무척이나 좋아한 예민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처한 환경은 비트겐슈타인과 정반대였다. 가난한 세무공무원집 아들이었던 히틀러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낙제생이었다. 게다가 열세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는 레알슐레를 자퇴한 후 남몰래 세상에 대한 적의를 키워나간다.

히틀러가 저술한 일종의 자서전 <나의 투쟁>에는 동창 비트겐슈타인을 비하하는 부분이 나온다.

“레알슐레에서 나는 유대인 소년을 한 명 만났다. 우리는 모두 그를 조심스럽게 대했는데, 그 이유는 경솔한 그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급생들이 비트겐슈타인 집안의 위세에 눌려 그를 조심스럽게 대했는지, 아니면 히틀러의 주장대로 그가 경솔했기 때문에 따돌렸는지 진실은 알 수 없으나 히틀러가 비트겐슈타인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은 단 한 번도 히틀러와의 소년시절 추억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비트겐슈타인에게 히틀러는 별 존재감이 없는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콤플렉스는 그런 것이다. 콤플렉스를 느끼는 그 상황을 다른 사람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콤플렉스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 키워나가는 비정상적인 정신상태가 콤플렉스일 테니까.

청년기를 거치면서 히틀러는 선동 정치가의 길에 들어섰고, 비트겐슈타인은 맨체스터대학과 케임브리지에서 수학하면서 천재 철학자로 명성을 얻는다.

히틀러의 콤플렉스는 그가 정치권력의 상층부에 이른 순간 극적으로 드러난다. 이미 비트겐슈타인 집안은 유대인 탄압과 전쟁으로 인해 몰락한 뒤였지만 히틀러의 열등감은 풀리지 않았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독일의 적(敵)으로 설정하기 위해 많은 논리를 동원했다. 다들 알다시피 가장 중요한 게 유태인이 독일의 부를 독차지했다는 비난이었다. 그 다음 논리가 재미있다. 히틀러는 난데없이 유대인들이 예술을 타락시켰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비트겐슈타인 집안을 염두에 둔 분노였다.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는 부를 쌓은 유태인들이 다수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예술을 후원한 집안은 비트겐슈타인 집안이 거의 유일했다. 한 가문에 대한 적의가 유대인 탄압의 논리가 된 것이다.

히틀러의 한풀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히틀러는 한 지역을 점령하고 나면 가장 먼저 박물관과 미술관을 접수해 그곳에 있는 유물과 작품들을 약탈했다. 히틀러는 ‘히틀러 박물관’을 세워 그 약탈품들을 보관했다. 히틀러 박물관은 다름 아닌 린츠에 있었다.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이 함께 다녔던 레알슐레가 있던 바로 그 도시다. 소름이 돋는다. 왜 하필 베를린도 뮌헨도 함부르크도 아닌 린츠였을까.

‘린츠의 한(恨)’이 대단하긴 했던 모양이다.
히틀러는 굳이 린츠에 제철소를 세워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공장을 흡수해버리기까지 한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히틀러가 어린 시절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면, 그래서 기형적인 콤플렉스를 키우지 않았다면 역사는 좀 다르게 흘러가지 않았을까.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말이다.



[허연 매일경제 문화전문기자·시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1호 (2019년 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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