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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우의 보르도 와인 이야기] 지금 마셔도 좋고 10년 후엔 더 좋은 샤토 파비
기사입력 2019.05.13 15:4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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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는 정말 많은 종류의 와인이 있다. 화이트와인과 레드와인, 로제와인처럼 누구나 쉽게 차이를 알 수 있는 와인들이 있는 반면, 포도품종에 따라, 또 생산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맛을 내는 와인들이 있어 나에게 맞는 와인을 고르기 위해선 약간의 수고가 필요하다. 가령 양조 방식에 따라 ‘보졸레 누보’처럼 포도를 수확한 후 빠르게 색소를 내어 만드는 와인이 있기도 하고, 토스카나의 ‘브루넬로디 몬탈치노’처럼 아주 오랜 기간 숙성을 하고 출시하는 와인도 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산악 지대에선 수확한 포도를 말려서 건포도처럼 만들어 양조하기도 하고 유럽의 각국, 특히 지중해 유역에서는 알코올을 첨가해 단 와인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와인을 만드는 입장에서 보면 와인에 따라 포도를 재배하는 방식과 양조하는 방식이 서로 달라서 많은 공부와 오랜 기간의 수련이 필요하지만, 다행히 와인을 즐기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 수많은 와인들은 크게 두 가지의 부류로 쉽게 나눌 수 있다.



▶향과 맛에 따라 달라지는 와인 잔

전 세계의 모든 와인들은 ‘향’으로 마시는 와인과 ‘맛’으로 마시는 와인으로 나뉜다. 서로 다르게 생긴 많은 와인 잔들도 가만히 보면 볼이 볼록한 와인 잔(사진1. 잘토 부르고뉴)과 볼이 반듯하게 생긴 와인 잔(사진2. 잘토 보르도) 2가지 종류로 크게 나뉜다. 볼록한 와인 잔은 와인의 향기를 잘 모아주어 와인이 가지고 있는 깊은 풍미와 다양한 향기를 잘 즐길 수 있게 한다. 최근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잘토(Zalto) 글라스는 향기와 맛 중에서 특히 향기를 아주 잘 표현해 주는 와인 잔이다.

대체로 프랑스 부르고뉴에서 생산되는, 껍질이 가벼운 피노누아(Pinot Noir) 포도로 만드는 와인 중에는 뛰어난 향기를 가진 와인이 많다. 체리 향 같은 과일 향뿐만 아니라 잘 숙성된 와인을 좋은 와인 잔에 마시면 마치 꽃밭에 있는 것처럼 화려한 향이 난다. 반면 오랜 오크 숙성기간을 거쳐 완성되는 프랑스 보르도 와인이나 나파밸리 와인들은 주로 맛으로 마시는 와인들이다. 비단처럼 부드러운 느낌과 잘 짜인 구조감을 보여주는 와인들은 오히려 화려한 향기가 와인을 즐기는 데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와인들은 사진2와 같은 반듯한 와인 잔을 사용한다. 화이트와인 중에서도 부르고뉴의 ‘몽라셰(Montrachet)’나 오래된 ‘비오니에(Viognier)’ 같은 와인들은 볼이 넓은 잔을 사용하여 향기를 충분히 즐기면서 마시는 편이 좋고, 뉴질랜드의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같이 상큼한 와인들은 반듯한 볼을 가진 작은 잔을 사용하는 편이 그 신선함을 잘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최근의 와인 소비 경향을 보면, 좋은 향기가 맛보다 좀 더 인기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보르도의 생테밀리옹 지역에서 거주할 당시, 러시아 부호들이 보르도 와인을 볼이 넓은 부르고뉴 잔에 마시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와인의 맛보다 향기에 좀 더 집중하겠다는 뜻인데, 당시에는 매우 신기하게 여겨졌으나 오늘날에는 매우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지금은 오래된 보르도 와인을 부르고뉴 글라스에 서비스하는 소믈리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최근에는 프랑스 고급식당에서도 샴페인을 부르고뉴 글라스에 서비스하는 경우가 있다. 사실 과거에 비해 전통적인 보르도 와인에서 향기를, 전통적인 부르고뉴 와인에서는 탄닌감을 찾는 크로스오버 취향도 크게 늘었다.

1. 잘토 브루고뉴

2. 잘토 보르도



보르도 그랑크뤼 등급은 지난 160년간 거의 변동이 없었으나 보르도의 최고급 와인들은 와인의 기본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그때그때의 유행에 따라 조금씩 맛과 스타일에 변화를 주며 발전해왔다. 경우에 따라 매우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온 와인들도 있다. 대표적으로는 제라르 페르스가 1998년에 인수한 ‘샤토 파비(Chateau Pavie)’다. 보르도 생테밀리옹 마을에 위치한 샤토 파비는 제라르 페르스가 인수하기 전에는 인근의 ‘샤토 피작(Figeac)’과 함께 가장 전통적인 와인에 속하는 보르도 와인이었다. 전통적인 보르도 와인이란 한마디로 기다림의 와인이다.

처음에는 조금 텁텁한 느낌이 나지만 오랜 시간을 지내고 나면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부모님이 물려주신 오래된 셀러에서 숙성된 와인을 꺼내 마실 수 없는 새로운 시장의 소비자들은 10년 이상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슈퍼마켓 비즈니스로 부를 쌓은 제라르 페르스는 새로운 고객들의 니즈를 빠르게 파악하였고 샤토 파비를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 즉 오랜 숙성을 기다리지 않고 와인이 어릴 때 마셔도 쉽게 마실 수 있게 변화시켰다. 많은 전문가들의 비난도 있었지만, 오랜 누적 적자로 고통 받던 샤토 파비는 제라르 페르스가 인수한 첫 해부터 흑자로 전환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로버트 파커가 인정한 2003년산 샤토 파비

샤토 파비가 만든 2003년산은 평론가들 사이에서 역사상 가장 많은 논쟁이 있었던 와인 중 하나다. 2003년은 이례적인 더위를 기록한 해로 강수량도 매우 적었다. 덕분에 2003년에는 달고 알코올 도수가 높아 오랫동안 숙성하지 않아도 쉽게 마실 수 있는 와인이 많이 생산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와인이 바로 샤토 파비다. 샤토 파비 2003년산은 몹시 진한 맛과 달콤한 향기로 특징지어지는 와인이다. 미국의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이 와인에 100점 만점에 100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주었다. 하지만 전통적인 와인 컬렉터들과 평론가들은 샤토 파비 2003년은 와인이 아니라 ‘과일폭탄’이라고 비난하였고, 영국의 잰시스 로빈슨은 “이렇게 우스꽝스런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파커를 조롱하였다. 샤토 파비는 한동안 전통적인 컬렉터들이 지배하고 있는 유럽 시장에서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반대로 미국과 일본 등에서는 큰 인기를 끌었다.

지금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세계 고급 와인 소비, 특히 보르도 고급 와인의 경우 중국과 미국 시장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제라르 페르스의 전략은 적어도 비즈니스 측면에서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지난 2012년 생테밀리옹 지역 와인의 등급을 다시 정하는 작업에서 샤토 파비는 ‘샤토 슈발블랑’ ‘샤토 오존’ ‘샤토 안젤뤼스’와 함께 생테밀리옹 최고의 와인 등급인 ‘1등급 A’에 속하게 되었으니 한마디로 품질 논쟁의 판정승을 거둔 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날 많은 보르도 포도원들은 샤토 파비와 같은 스타일의 와인을 만든다. 지금 마셔도 좋고 10년 후에 마셔도 좋은 와인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가장 보수적인 포도원인 샤토 라피트 로칠드의 ‘샤를 슈발리에’마저도 지난 100년간 와인 양조기술에서의 가장 큰 진보라고 칭했을 정도이다. 지난 4월 첫째 주 프랑스 보르도에서는 전 세계 와인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2018년산 와인을 선보이는 행사가 열렸다.
아직 숙성이 끝나지 않은 상태의 와인을 배럴 상태에서 시음하는 행사로 보르도의 연간 스케줄 중에 가장 중요한 일정이다. 나는 약 15년 전 샤토 파비 2003년산을 처음 시음했을 때 다른 와인과 확연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이번 시음 행사에서는 더 과일폭탄 같은 다른 와인들에 비해 훨씬 점잖은 느낌을 받았다. 마치 황태자 시절의 자유분방함을 버리고 등극한 품위 있는 리더의 모습이었다.

[이민우 와인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4호 (2019년 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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