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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의 1막1장 | 권력의 희생양인가? 탐욕에 물든 폭군인가? 연극 `리처드 3세`
기사입력 2018.02.08 16:3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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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영국 레스터의 한 주차장에서 발견된 유골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 유골이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숨진 이후 528년 만에 세상에 나온 리처드 3세로 추측되었기 때문이다. 유골의 척추가 심하게 휘어져 있어 그가 척추측만증(척추 옆굽음증) 때문에 걸음걸이가 매우 불편했다고 내려오는 그에 관한 풍문이 더욱 또렷해지는 순간이었다.

영국 요크왕조의 마지막 왕인 리처드 3세(1452~1485)는 형인 에드워드 4세 왕이 숨지자 조카를 몰아내 죽인 난폭한 폭군 ‘영국판 수양대군’으로 후세에 알려졌다. 다만 수양대군은 왕위를 굳건히 다지고 그의 후손들이 대대손손 조선 종묘사직을 이어간 반면, 리처드 3세는 단지 26개월만 왕좌에 앉을 수 있었다. 영국왕위 찬탈전쟁이었던 30년간의 장미전쟁(1455~1485)의 종지부를 찍는 보즈워스 전투를 지휘하다가 적지인 레스터에서 비명횡사한 그를 역사는 탐욕과 야욕으로 점철된 가장 몰상식한 악인으로 기억한다. 그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전신초상화를 남기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그의 장애상태를 가늠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가 심하게 돌출된 주걱턱에 매부리코 때문에 볼품없이 못생겼고, 휜 허리와 움츠러든 왼팔, 꼽추였다는 기록에 의해 후세는 그의 이미지를 상상할 따름이었다.

레스터 대학 연구팀은 혈통 연구가들이 2005년에 확보해둔 유골 DNA를 바탕으로 유골의 주인공이 리처드 3세라는 결론을 내린다. 레스터시(市)는 약 250만파운드(약 42억원)를 들여서 비참하게 전사한 리처드 3세의 명복을 빌며 존엄하고 영예로운 안식처를 성대하게 마련했다. 장례식에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며느리인 웨식스 백작부인과 글로스터 공작 부부 등의 왕실 인사들이 참여했고, 리처드 3세의 16대 먼 후손으로 알려진 영화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직접 추도사를 낭독했다.

외로운 죽음조차 악한의 통쾌한 최후라며 손가락질 받았던 리처드 3세의 뼛속까지 사무친 원한이 드디어 녹아내렸을까? 그 뒤에 레스터에는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153㎞ 떨어진 잉글랜드 중부에 위치한 인구 35만 명의 평범한 도시였던 레스터가 중세관광 인기도시로 급부상하면서 지역경제에 활성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또한 리처드 3세의 장례식 이후, 놀라운 일은 더 있다.

2014~2015년 영국 축구 프리미어리그에서 강등 위기에 놓였던 레스터 시티가 연승 행진을 이어가면서 프리미어리그에 안착할 수 있었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이듬해 리그에서 레스터 시티 축구팀은 23승 12무 3패의 놀라운 성적으로 창단 132년 만에 처음으로 만년꼴찌에서 벗어나 우승을 차지했다. 5000분의 1(0.02%)의 우승배당 확률을 가능케 한 기적의 이유를 국왕의 명예를 되찾게 해준 레스터 시에 대한 리처드 3세의 보답이라는 신비로운 해석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영국 역사에 관심이 없던 많은 이들이 리처드 3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가 폭군의 멍에를 뒤집어 쓴 것은 역설적으로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역사희곡 <리처드 3세>라는 역작의 효과 덕분이었다. <리처드 3세>는 셰익스피어(1564~1616)의 연극작품 중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작품으로 뒤틀린 정치적 욕망이 야비하게 실현되는 과정과 파멸의 몰락을 그린 리처드 3세의 모노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역사는 살아있는 권력의 입맛에 맞게 미화되고 가공된다. 셰익스피어는 리처드 3세에게 복수의 칼날을 겨누어 권력을 얻은 헨리 7세의 튜터 왕조 시대 사람이다. 작가적 양심 때문에 튜터 왕조의 입맛에 맞는 절대 충성은 안 하더라도 적어도 셰익스피어보다 54년 전에 작가 토머스 모어(1477~1535)가 묘사한 리처드 3세의 폭군적 악행은 고스란히 따라야 하는 분위기였다. 토머스 모어는 리처드 3세를 통해서 잔악한 권력을 고발하고 더 나아가 유럽 국가들의 문제점을 재미있게 풍자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휴머니티 국가를, 또 다른 작품인 <유토피아>를 통해서 제시했다.

· 공연일시 : 2018년 2월 6일부터 · 공연장소 : 예술의 전당 CJ토월극장(황정민, 김여진, 정웅인 출연)

셰익스피어는 희곡작가이다. 희곡은 연극으로 무대에 나올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역사적 인간의 내면에 더욱 중점을 두고 있다. 글로 만나보는 인간은 치를 떨게 하는 악당이지만, 무대 위에서는 혐오스러운 매력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당대 최고의 인기 극작가이자 동시에 제작자였던 셰익스피어는 영국을 피비린내 나는 전장으로 만들었던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을 다룬 연극이 대중의 관심을 끌 것이라고 직감적으로 판단했다. 셰익스피어는 아직도 아득하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장미전쟁 4부작을 우선 세상에 내놓았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고 관객들은 극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 호황은 훗날 그의 명작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는 경제적 뒷받침이 되었다. 그 장미전쟁 4부작의 마지막 편이 <리처드 3세>이다. <리처드 3세>는 1471년 친형인 에드워드 4세가 왕이 된 시점에서 자신이 왕관을 빼앗기는 1485년까지 14년간의 랭카스터 집안과 요크 집안의 영국왕실을 밀도 있게 다루고 있다. 두 집안의 문장인 빨간 장미와 백장미로 인해서 장미전쟁으로 명명되었지만 전쟁은 아름다운 꽃과는 정반대로 일그러진 권력욕뿐이다. 셰익스피어는 장미전쟁 4부작에서 권력은 명분과 혈통의 정당성이 아닌 비정한 힘의 논리에 의해 뺏고 빼앗기고 있으며 정치권력은 설정된 연극적 선동에 날조된다고 강조한다.

막이 오르면 에드워드 4세의 대관식 날에 훗날 리처드 3세가 되는 글로스터 공작이 절뚝거리며 무대에 나와 독백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펼친다. 그는 자신은 남들이 모두 누리는 평화로운 행복을 빼앗긴 불구의 처지라며 동정심을 유발한다. 그러고는 최고 권력을 누리며 군림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열변을 토하며 강렬한 에너지로 관객을 설득한다. 그리고는 왕권 쟁취를 위해 하나하나 자신의 목표를 세워 사악한 음모와 추악한 권모술수 계략을 실행에 옮긴다. 그는 상대의 마음을 관통하는 탁월한 언변으로 자신이 살해한 황태자의 미망인 앤에게 구혼하기도 하고, 왕위 계승자인 조카를 사생아로 몰아 왕위를 빼앗고 민심을 선동하며 민의를 훼손한다. 그리고 가신들을 정적으로 여기고 한 명씩 제거하기 시작한다. 극에서 리처드 3세는 방대한 분량의 독백으로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며 철저한 악당임을 증명한다. 그래서 리처드 3세 역을 맡은 배우는 이 모든 것을 소화하기 위해 고도의 집중력으로 완벽하게 극에 몰입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 10년 만에 연극무대에 복귀한 배우 황정민은 연습실에서 16시간을 연습하며 한겨울에 땀방울을 쏟아내고 있다.

역사는 과거지만 무대는 현재이다. 리처드 3세의 형인 선왕 에드워드 4세는 22년을 재임했지만, 셰익스피어는 단 하나의 임종장면에서만 그를 등장시킨다. 연극 안에서는 2년 재임한 리처드 3세가 역사의 중심으로 영국을 움직인다.
‘리처드 3세’는 영국사에서 벗어나 언제나 현재의 관객과 만나 소통했다. 그래서 이번 황정민의 리처드 3세는 어떤 모습일지 사뭇 궁금하다. 리처드 3세가 승자만 기억하는 역사의 희생양인지, 잔악한 폭군인지에 대한 해답은 이제 관객의 몫이다.

[황승경 국제오페라단장 사진제공 샘 컴퍼니]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89호 (2018년 0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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