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신청

[년 월 제 호] 프린트 이메일 전송 리스트
[이민우의 보르도 와인 이야기] 2000·2005년 빈티지 비싼 이유는
기사입력 2018.02.08 16:16:55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음악과 영화, 미술과 문학 작품을 즐기기 위해 최소한의 지식이 필요한 것처럼 비싼 값에 산 와인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선 몇 가지 규칙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특히 고급 와인일수록, 비싸지는 않더라도 신념에 찬 와인 메이커가 만드는 와인일수록 이 규칙들을 이해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가령 음악의 음표, 영화의 장르처럼 작품을 즐기기 위한 규칙에 필적할 만한 것들이 와인에 있다면 ‘생산지역’과 ‘빈티지’를 꼽을 수 있다.

생산지역은 기본적으로 프랑스의 보르도 또는 미국의 캘리포니아 같이 와인이 생산된 지역을 의미한다. 모든 와인의 레이블에는 생산지가 표시되지만, 반대로 모든 와인이 자기가 태어난 마을 이름을 와인 레이블에 표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건 아니다. 마을 이름을 와인 레이블에 사용하기 위해선 그 지역의 포도가 사용되어야 함은 물론이며, 그 지역에서 부여하는 의무 조항을 꼭 준수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프랑스 보르도에서 만드는 마고(Margaux) 와인은 마고 마을에서 재배된 ‘카베르네 소비뇽’이라는 포도를 주로 사용한 적포도주이며, 포도를 하나하나 손으로 따서 만들어야 하는 고급 와인이다.(오른쪽 사진 참조) 그리고 이 규정을 지켜서 와인을 만들어야만 비로소 마고라는 이름을 레이블에 표시할 자격이 생긴다. 만약 마고 동네에서 허용되지 않은 ‘피노누아’라는 포도를 사용한다면 기껏해야 ‘Made in France’ 정도의 문구만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레이블에 표시된 생산지역은 양조가가 와인을 만들면서 따라야 하는 일종의 레시피의 이름과 같으며, 전 세계의 생산지역은 각자 고유한 레시피를 갖고 있다.

반면 빈티지는 와인을 만들기 위해 사용된 포도가 언제 수확되었는지를 의미하며 생산지역과 같이 의무적으로 와인 레이블에 표시된다.(사진참조) ‘생산지역 이름’이 사람이 만든 레시피라고 한다면, 빈티지는 일종의 자연이 만들어주는 레시피다. 해에 따라 포도 수확철에 비가 많이 오는 경우도 있고, 싹이 트기 전에 우박이 내리는 경우도 있고, 1년 내내 따스한 햇살이 비춰 어려움 없이 포도가 자라는 해도 있다. 좋은 해에는 누구나 좋은 와인을 만든다. 최근 보르도에서 대표적인 빈티지는 2015년과 2016년, 2005년과 2006년, 2000년 등이다. 이런 해에는 와인을 만들기도 쉽고 비싼 와인이나 저렴한 와인이나 대부분 좋은 품질을 갖고 있다.

반대로 날씨가 좋지 않았던 빈티지의 와인들이 있다. 최근 빈티지 중에는 2013년에는 여름 내내 날씨가 흐려서 포도가 잘 여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못했다. 보르도 역사상 가장 어려운 빈티지라고 뽑는 1991년의 경우 1년 내내 비와 폭풍이 번갈아 일어나서 좋은 포도를 따기도 어려웠고, 수확량도 평소의 10%밖에 안 돼 많은 와인 농가가 빚더미에 올랐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해에도 좋은 와인을 만드는 포도원이 있어서 와인 애호가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옛날에는 날씨가 어려운 해에 와인의 품질이 늘 좋지 않았다고 생각을 했지만,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각 기후 상황에 따라 대응하는 레시피가 있어 좋은 와인을 만들기 어려운 해 정도로 기억하면 좋을 것 같다. 어려운 레시피를 잘 따라간 와인 메이커는 좋은 와인을 만들고, 레시피가 어려워서 포기한 와인 메이커는 품질이 떨어지는 와인을 만든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날씨가 좋지 않았지만 많은 와인메이커들이 좋은 와인을 만든 해는 대표적으로 2008년이 있다. 2008년은 2013년처럼, 포도가 잘 자라야 할 여름 시즌의 날씨가 썩 좋지 않았다. 2008년 포도 수확이 끝났을 때, 와인 평론가들도 악평을 쓸 준비를 끝냈다. 하지만 그 이듬해 발효를 끝내고 막 숙성을 시작했을 때, 오크통에 있는 어린 와인들을 시음하면서, 오히려 어떤 와이너리들은 보르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와인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세계적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2008년산 와인의 배럴 테이스팅에서 샤토 라피트 로칠드(Lafite Rothschild), 샤토 오존(Ausone), 페트뤼스(Petrus) 와인에 100점 만점에 100점을 줬다. 물론 위 3개 와인은 빈티지에 상관없이 좋은 와인을 만드는 최고급 포도원들로, 만약 그보다 적은 가격의 2008년산을 추천한다면 샤토 오바이(Haut Bailly), 샤토 퐁테카네(Pontet Canet), 샤토 트롤롱-몽도(Troplong Mondot) 등을 꼽을 수 있다.

샤또 마고

빈티지는 와인의 숙성 잠재력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좋은 빈티지의 와인은 대체로 오랫동안 숙성할수록 좋은 맛을 낸다. 몇 년 전 보르도의 샤토 라투르(Latour)라는 고급 포도원에서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이날은 6개의 와인이 10년의 빈티지 차를 두고 2001, 1991, 1981, 1971, 1961, 마지막으로 1939년산이 서브됐다. 처음 와인을 서브할 때 빈티지를 가르쳐 주지 않고 손님들이 맞추도록 했는데(이런 시음을 블라인드 테이스팅이라고 부른다), 손님 중 누구도 빈티지는커녕 어떤 와인이 더 오래되었는지 맞추지 못했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빈티지 중에 하나로 꼽히는 1961년산이 오히려 30년이나 어린 1991년산이나 1981년보다 훨씬 더 어리게 느껴졌다. 바로 좋은 빈티지가 가진 힘이다. 지인들 중에는 아주 고가의 와인을 사서 중요한 손님들과 식사에서 마셨으나, 생각보다 맛이 없었다고 불평을 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사실 보르도 와인들은 특히 고급 와인에 좋은 빈티지의 와인일수록 지금보다 10년 혹은 20년 후에 가장 좋은 맛을 낼 수 있도록 디자인된 레시피에 따라 양조를 한다. 그러니 최근에 만든 와인이 맛없게 느껴지는 건 오히려 당연할 수 있다. 2005년 보르도 양조학교에서 공부할 당시 수업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마트 와인 코너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 마트의 와인 장터에서 만난 한 노부부가 무려 2만유로 정도의 와인을 구매했는데, 이 부부의 말에 따르면 지금 사는 와인들은 손주들을 위한 와인이고, 본인들은 30년 전 자신들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구매해 지하 셀러에 보관 중인 와인을 드신다고 했다. 프랑스의 보르도 와인 애호가들은 자연스럽게 오래된 와인을 즐긴다. 그리고 ‘나는 보르도 와인 애호가’라는 말은 30년 전에 좋은 와인을 사 놓을 수 있는 재력이 있는 조상을 두었다는 의미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도 같은 와인을 여러 병 구매해 매년 한 병씩 마시며 시간의 변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포함해 비교적 최근에 와인을 마시기 시작한 국가의 사람들에게는 30년 전 좋은 와인을 수집한 가족을 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다행히 최근 와인 양조의 레시피는 우리 같은 사람들도 좋은 와인을 즐길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보르도의 대표적인 고급 와인 장인인 샤를 슈발리에(Charles Chevalier)에 따르면 20세기 와인 양조기술의 가장 큰 진전은 30년 후에 마셔도 좋고, 지금 마셔도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최근 빈티지의 와인을 지금 마시기 위해서는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직업상 샤토 라피트 로칠드라는 최고급 와인의 최근 빈티지를 중요한 고객들에게 소개해야 할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럴 때는 보통 전날 와인을 오픈해 약 1시간 정도 디캔터라고 불리는 유리병에 담아 두었다가 다시 와인을 병에 담아 서비스한다. 이런 것을 전문용어로 ‘더블 디캔팅’이라고 하는데, 30년 후에 마시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고급 와인의 퍼포먼스를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좋은 와인일수록 그리고 좋은 빈티지의 와인일수록, 와인을 서비스 하는 기술이 매우 중요하다. 뛰어난 소믈리에들은 각 빈티지의 좋은 와인을 고르는 데 능숙하기도 하지만 그 와인이 갖고 있는 잠재력을 끌어내 서브하는 기술을 갖고 있기도 하다. 만약 여러분이 좋은 와인을 따야 할 자리가 있다면, 능력 있는 소믈리에게 서비스를 부탁하는 것이 좋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89호 (2018년 02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EO 걷기 프로젝트] 아픈 곳 치유하듯 굽이굽이 껴안은 풍경 '속리산국립공원 세조길'

카카오게임즈 등 IPO 줄줄이 대기 공모주 투자 올해도 대박낼까

강원도 부동산의 힘-KTX따라 돈이 흐른다 강릉·속초 아파트값 ‘쑥’

네모난 時間

황승경의 1막1장 | 권력의 희생양인가? 탐욕에 물든 폭군인가? 연극 '리처드 3세'


경제용어사전 프린트 이메일 전송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