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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진훈 칼럼] 안개 女神이 막은 트럼프 펀치
기사입력 2017.11.30 18: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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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여신 헬(Hel)의 심술일까, 아니면 축복일까?

북유럽 신화에서 안개와 얼음나라를 다스리는 헬은 암흑과 죽음의 상징이다. 육체의 절반은 인간처럼 살아 숨 쉬는 피부를 가졌지만, 나머지 절반은 푸른색의 죽은 피부를 지녔다. 흉측한 외모를 가리기 위해 아름다운 요정 님프의 피를 짜 마실 정도로 잔인하기 그지없다. 영화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신의 도시 아스가르드를 멸망시킨 죽음의 여신 ‘헬라’가 바로 그녀를 본떠 만든 캐릭터다.

이 안개의 여신이 한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을지도 모를 11월 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역사적인 이벤트를 망쳐 버렸다. 방한 전부터 냄새를 솔솔 풍기며 연막작전을 폈던 비무장지대(DMZ) 깜짝 방문이 바로 그것이었다.

안개 여신의 요술은 참으로 기묘했다. 앞날이든 뒷날이든 방한 날짜를 하루만 조정했더라도 한·미 대통령이 사상 처음 DMZ 앞 초소에 나란히 선 장면이 전 세계에 방송됐을 것이다. 아니 당일 스케줄에서 국회연설(오전 11시)과 DMZ 방문(오전 7시23분) 순서를 바꾸기만 했더라도 역사가 달라졌을지 모른다.

기상청에 문의해 보니 이날 파주지역에 안개가 짙게 끼어 헬기 착륙이 불가능했던 시간은 불과 3시간 정도였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아침 7시께 용산 미군기지에서 美대통령 전용헬기인 ‘마린원’을 타고 55㎞ 가량 떨어진 DMZ로 향했다. 하지만 18분을 날아가 목적지에 5분 거리까지 다가섰지만 아쉽게도 기수를 돌려야 했다. 주변 다른 헬기를 육안으로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안개가 짙어 도저히 착륙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외신들은 안개 탓에 가시거리가 1마일(1.6㎞)에도 채 못 미쳤다고 보도했다.

실제 기상청은 이날 오전 7시 기준 파주일대 가시거리가 1.2㎞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용산기지로 되돌아온 트럼프 대통령은 방탄 차량 안에서 1시간가량 안개가 걷히길 기다렸다. 하지만 파주지역 가시거리는 오전 8시께 870m로 최악이었고, 9시에도 1.6㎞로 헬기가 뜨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못내 아쉬워했지만 참모들이 국회방문 등 다음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고 독촉하자 9시에 결국 DMZ행 포기를 결정했다. 헬기에서 자동차로 갈아타고 먼저 DMZ 초소에 도착해 있었던 문재인 대통령도 9시 3분께 현장에서 철수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10시에는 가시거리가 2.9㎞까지 호전됐고, 1시에는 10㎞ 이상일 정도로 안개가 완전히 걷혔다. 국회연설까지 딱 1시간만 더 여유가 있었더라도 DMZ 방문이 가능했던 셈이다.

안개 여신의 장난으로 의심되는 대목은 또 있다. 오전 8시 기준으로 바로 전날에는 가시거리가 18㎞, 다음날에는 20㎞에 이를 정도로 날씨가 쾌청했다는 점이다. 사전에 청와대가 기상예보 정도는 체크했을 텐데 참으로 공교롭게도 그날 그 3시간 동안만 안개가 트럼프의 발목을 잡았다.

외신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예정대로 그날 DMZ를 방문했더라면 북한에 모종의 압박성 메시지를 던졌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물론 남북관계 해빙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문 대통령의 체면을 고려해서 독설까지는 피해갔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적어도 김정은 위원장의 코앞에서 한·미 정상이 나란히 쌍안경을 들고 북한을 응시하는 사진 한 장만으로도 그의 간담을 충분히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어쩌면 지난 수개월간 끌어온 트럼프 대북압박의 클라이막스로 기록될 뻔했던 역사적 순간을 안개의 여신이 가로막은 셈이다. 의도치 않게 힘을 빼버린 트럼프의 ‘피니시 블로성 펀치’가 김정은 정권과 한반도의 운명에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는 오직 신만이 알 것 같다.

[설진훈 LUXMEN 편집인·편집장]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87호 (2017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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