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 창세기에 따르면 원래 지구에는 하나의 언어만 있었다. 그러나 바벨탑 공사에 분노한 신은 인간들이 서로 다른 언어를 쓰게 했다. 당연히 사람들은 제대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게 됐고 갈등과 반목이 생겨났다. 이후 지구상의 수천 가지 다른 언어는 문화의 교류와 소통을 어렵게 했다.
그러나 문화 콘텐츠 전달에 다른 언어가 장애가 되는 시간은 이제 길지 않을 듯하다. 실리콘밸리에서 태동한 벤처기업 비키닷컴 덕분이다. 동영상 TV 플랫폼인 비키닷컴(www.viki.com)을 거치면 드라마나 영화가 며칠 만에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된다. 비키닷컴의 수많은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본인이 관심 있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자국의 언어로 번역해 자막을 단다. 이런 식으로 비키닷컴에서는 163개국의 언어로 된 20억개가량의 콘텐츠를 즐길 수 있다. 예를 들어 몇 년 전 MBC에서 방영된 `장난스런 키스`란 드라마가 비키닷컴에 올라오면 한국 회원들뿐만 아니라 한류에 관심이 많은 다른 외국 회원들까지 대사 번역에 매달린다. 이런 식으로 짧은 시간에 70여 개 언어의 버전이 함께 나오게 된다.
비키닷컴의 라즈믹 호바히미안(Razmig Hovaghimian) 최고경영자(CEO) 겸 공동창업자는 최근 방한해 매일경제 MBA팀과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비키닷컴은 회원들의 자발적인 집단 지성을 활용해 수많은 번역 자막을 만들어내는 비디오판 위키피디아다. 좋은 콘텐츠를 글로벌 시장에 확산시키는 엔터테인먼트 세계의 새로운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호바히미안 CEO와 일문일답한 내용이다.
－비키닷컴의 수익 모델을 설명해달라.
▶우리는 방송사나 영화사로부터 콘텐츠를 사서 회원들한테 제공한다. 회원들에게 제공하는 동영상 시작 전이나 중간에 광고를 붙여 수익을 얻는다. 우리처럼 스트리밍 동영상을 서비스하는 훌루(Hulu), 넷플릭스(Netflix) 같은 파트너들에게도 자막이 번역된 콘텐츠를 판매하고 있다.
우리의 차별화된 성공 비결은 회원들의 자막 번역이다. 163개국의 언어로 번역이 된 콘텐츠가 제공되기 때문에 훨씬 많은 회원들을 모을 수 있고 광고 효과도 커진다. 예를 들어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수입한다고 하면 기존 사업 모델로는 일본 내 시청자들만 겨냥할 수 있지만 이젠 시청자를 모으는 데 국경의 제한이 없어졌다.
－비키닷컴 회원들이 대가 없이 자발적으로 자막을 번역한다. 비전문가들의 작업인 만큼 번역의 질에 문제는 없나?
▶방송사들이 나중에 해외용 DVD를 만들 때도 우리 자막을 그대로 쓴다. 그만큼 우수한 품질을 자랑한다. 여러 사람들이 자막 작성과 편집에 매달리면서 집단지성이 발현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언어당 번역 자막을 달 만한 역량을 가진 사람이 500여 명에 이른다.
번역의 질 관리를 위해 두 가지 방식이 더 보완된다.
하나는 피어 리뷰(peer review)다. 여러 회원들이 남들이 단 자막을 평가하고 점수를 매기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우수한 번역가를 선별할 수 있다. 회원들은 피어 리뷰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더욱 정확한 번역을 하게 된다.
또 채널마다 하나의 매니저를 배정한다. 채널 매니저가 해당 콘텐츠의 번역이 제대로 됐는지를 점검한다. 매니저들은 의학드라마의 정확한 번역을 위해선 응급실 간호사를 섭외하고 법률드라마를 번역할 때는 변호사의 자문을 구한다. 비키닷컴 동영상의 번역은 단순한 아마추어리즘이 아니다.
－비키닷컴으로 콘텐츠 이용자들의 사용자경험은 어떻게 바뀌었나.
▶비키닷컴ㆍ유튜브ㆍ넷플릭스ㆍ훌루 등의 동영상 플랫폼은 고객의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었다. 고객들은 더 이상 정해진 시간에 동영상을 보지 않는다. 언제든지 보고 싶을 때 스트리밍해서 본다. 휴대폰이나 태블릿으로 보는 것도 일반화됐다.
소셜TV 기능도 비키닷컴이 주는 색다른 사용자 경험이다. 타임 코멘트(time comment) 기능이 그런 예다. 콘텐츠를 보면서 특정 장면에서 코멘트를 남길 수 있다. 남들이 남긴 코멘트도 볼 수 있다. 코멘트 역시 번역되기 때문에 다른 언어권 시청자들의 생각도 알 수 있다. 나는 이것을 `문화의 실크로드`라고 부르고 싶다.
소셜TV는 해당 언어권 사람들의 결속을 높이는 계기도 된다. 러시아에선 `우르모트`라는 소수언어를 쓰는 부족을 예로 들어보자. 이들은 비키닷컴에 들어가 동영상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면서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과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
－사업은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초기에 겪던 어려움은 어떤 것이 있었나.
▶외부에선 우리를 안정적으로 돈을 버는 성공한 벤처 기업으로 보지만 정작 나는 아직도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다. 지금은 올라가고 있지만 언제 고꾸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사업 초기에는 자금 문제가 가장 컸다. 비키닷컴은 미국에 온 유학생들이 드라마나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서 영어 공부를 한다는 데 착안해 만든 사이트다. 2011년 베타버전을 출시하고 창업을 했지만 자금 조달이 여의치 않았다. 시장을 새로 만들어가는 사업이라 광고주들은 굉장히 보수적인 입장이었다. 자금난에 허덕이다가 SK텔레콤과 BBC의 전략적 투자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기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팀을 꾸리고 기업 문화 구축에 힘써야 한다. 나는 항상 미래의 가능성을 키우고 싶다. 20달러가 탁자 위에 있더라도 안 쓰려고 한다. 향후 100달러의 가치를 줄 수 있도록 아껴둬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9월 세계 최대 인터넷 서비스 기업 중 하나인 라쿠텐에 인수됐다. 그후 달라진 점은.
▶보다 장기적으로 회사가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진 장기 전략을 세운다고 하더라도 돈이 없으니 1년 앞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라쿠텐의 인수로 비키닷컴은 성장의 날개를 달았다고 할 수 있다. 비키닷컴은 라쿠텐과의 협력을 통해 엔터테인먼트 생태계를 구축하는 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인기를 끌 만한 콘텐츠를 구매해 회원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동영상 스트리밍 업체들의 숙제다. 비키닷컴은 인기 콘텐츠를 어떻게 고르나.
▶단순히 지상파에서 시청률이 높았거나 영화 흥행실적이 좋았다고 콘텐츠를 사오지는 않는다. 그런 식으론 안전하게 평타를 칠 수는 있어도 인기 콘텐츠를 놓칠 수 있다. 일본 아사히TV의 `W의 비극`, MBC의 `장난스런 키스` 같은 드라마도 모두 본국에선 재미를 못봤지만 비키닷컴에선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우리는 과거 회원들의 누적된 이용 실적을 모두 모아 어떤 콘텐츠가 누구에게 인기 있을지 예측한다. 회원들의 클릭, 평점이 모두 데이터로 쌓여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흥행 여부가 애매모호한 콘텐츠는 잠시 임시로 오픈해 반응을 보기도 한다.
－비키닷컴의 파트너사로는 어떤 회사가 있나.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는 방송사나 영화 제작사들은 모두 우리의 파트너다.
유통 채널 측면에선 모바일 기기 회사와 파트너 관계를 맺고 있다. 동남아 지역의 경우엔 휴대폰을 통해 처음 비키닷컴을 경험해봤다는 응답이 대부분이다. 싱가포르의 경우 70%의 비키닷컴 이용자들이 모바일을 통해 처음 접속했다고 밝혔다.
삼성전자가 제작한 갤럭시 휴대폰의 첫 배경화면에 비키닷컴의 애플리케이션이 자동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비키닷컴 창업 전에 일하던 방송국의 경험이 어떤 도움이 됐나?
▶방송국에서 기획 부서를 맡다 보니 어떠한 TV 프로그램으로 어느 시장을 공략할지에 대해선 배웠다. 그러나 콘텐츠를 어떻게 확산시켜 글로벌에 제공할지는 몰랐다. 비키닷컴은 팬들과 결합해서 해외 시장을 공략하는 방식인데 방송국에선 이런 신선한 아이디어가 활용되기보다는 기존 방식의 경영을 했다.
다만 방송국에 있을 때의 경험으로 자체 콘텐츠 개발은 매우 리스크가 크다는 것을 제대로 실감했다. 제작되는 드라마 중 15% 정도만 성공하고 이마저 시즌 3~4는 제작해야 수익이 나는 상황에서 콘텐츠를 만들기보다는 세상의 수많은 좋은 콘텐츠를 전파하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비키닷컴의 목표는?
▶콘텐츠를 추천해줄 수 있는 엔진 기능을 보강하고 싶다. 차별화된 광고도 수익을 올리기 위해 필요할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는 기업들에서 광고를 받으면 모든 콘텐츠에 깔았는데 이제는 도요타 광고 콘셉트와 맞는 하나의 채널만 선택할 수 있도록 채널 구조를 개편하는 것이다. 광고주는 광고와 콘텐츠가 겉돌지 않고 부드럽게 섞이길 원하기 때문이다.
■ He is…
라즈믹 호바히미안(Razmig Hovaghimian) CEO는 2010년 하버드대에서 유학 생활 중이던 호창성ㆍ문지원 부부와 함께 비키닷컴을 창업했다.
비키닷컴에 합류하기 전 NBC 유니버설 인터내셔널 스튜디오 벤처에서 콘텐츠 개발 및 펀딩을 총괄했다. 또한 전략기획 분석팀을 하며 미국의 미첼 매디슨 그룹, 일본 덴쓰 등의 기업과 함께 뉴미디어 사업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 UC버클리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김제림 기자 / 사진 = 박상선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허승의 사례로 풀어보는 세금 이야기] 아들에게 주택 매도와 동시에 임차했다면 증여에 해당할까?](http://file.mk.co.kr/meet/2024/04/image_psthumb_2024_292445_1713517244.jpg)
![[송경은 기자의 미식미담(美食美談)] 조우 | 고즈넉한 이탤리언 키친에서의 산뜻한 와인 다이닝](http://file.mk.co.kr/meet/2024/04/image_psthumb_2024_288429_1713420137.jpg)
![[정현권의 뒤땅 담화] 골프는 걸을 수 있는 만큼만 가능하다](http://file.mk.co.kr/meet/2024/04/image_psthumb_2024_284706_1713330506.jpg)
